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조선시대 사용하던 『大明律』 「형률(刑律)」 포망편(捕亡編)에는 지정장닉죄인조(知情藏匿罪人條)를 두어 범죄자를 숨겨주고 관사(官司)에 신고하지 않은 자를 처벌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명률』의 「명례율(名例律)」에는 친속상위용은조(親屬相爲容隱條)를 두어서 일정한 범위의 친속(親屬) 간에는 서로 숨겨주는 것을 용인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조문을 ‘용은(容隱)’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용은을 허용한 것은 무엇보다 윤리(倫理)와 풍화(風化)를 돈독케 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조문에 따르면 동거인(同居人)이나 대공(大功) 이상의 친속 및 외조부모·외손·처부모·사위·손주며느리·남편의 형제·형제의 아내를 은닉한 경우는 논죄하지 않았다. 또, 노비가 가장(家長)을 숨기는 경우도 역시 논죄하지 않았다. 반면에 소공(小功) 이하의 친속은 처벌을 전부 면해주지는 않았지만, 보통의 경우에 비해서는 감경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예외가 있어서 모반(謀叛) 이상의 죄를 범한 경우에는 용은의 대상이 아니었다.
1409년(태종 9)에는 종매(從妹)의 간통죄를 고발한 자가 용은하지 않고 추악함을 밖으로 드러내었다고 하여 처벌되었다. 1434년(세종 16)에는 동생이 절도(竊盜)한 것을 타인을 시켜서 고발하게 한 남자 종[私奴]을, 형임에도 숨겨주지 않았다고 하여 신문하여 조사토록 했다. 한편 1451년(문종 1)에는 식견이 있는 남편이 되어 절도(竊盜)한 아내를 버리지 않고 도리어 죄를 숨겨주었다고 하여 용은의 법리를 적용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용은이 허용되는 친속간이라고 하더라도 증인이나 참고인 자격으로는 신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488년(성종 19)에는 노비(奴婢)를 신문하여 주인의 죄상(罪狀)을 고하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성종은 노비가 직접 고하는 것과 국가(國家)에서 신문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반면에 1534년(중종 29)에는 간통한 며느리의 죄를 조사하기 위해 시어머니를 증인으로 신문하는 것은 용은의 법례에 어긋나고 은의(恩義)도 손상하는 것이라는 견해에 따라, 신문을 그만두게 하라는 전교(傳敎)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