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 국가의 공식 기록을 담당한 예문관의 봉교·대교·검열 등 8명을 전임 사관이라고 한다. 이들의 임무는 왕의 언행과 정사(政事), 대소 신료들의 활동 등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을 있는 그대로 직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관의 기록은 왕과 신하들에게 직접적인 간언과 탄핵을 하였던 대간만큼이나 정국에 미친 영향력이 컸다. 그런데 전임 사관만으로는 국가의 시행사 일체를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중앙은 물론 지방에도 기록을 담당하는 겸임 사관을 광범하게 운영하였는데, 외사는 그러한 의도에 따라 지방에 설치한 겸임 사관의 하나이다.
[담당 직무]
사관은 국정이 논의되는 자리에 참석하여 왕의 언행과 시비득실, 정책의 입안 및 집행 등과 관련된 일체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중앙의 시행사와 마찬가지로 지방 행정의 일체, 즉 왕의 분신인 수령의 정사와 시비득실, 제반 풍속의 선악(善惡) 등도 기록해야 했다. 이러한 일을 수행한 지방의 겸임 사관을 외사라고 한다. 즉 외사란 도·부·군·현 등의 지방 행정 단위에서, 모든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관을 말하는 것이다.
[변천]
고려왕조에서는 1018년(고려 현종 9) 지방 제도가 정비되면서 3경과 4도호부 8목에 사록(司錄)을 배치하고 이들에게 외사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사록은 사관(史館)의 수찬관이나 직관처럼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사람 중에서 선발하였으며, 외사직 수행 후에는 요직에 제수되었던 청요직의 하나였다. 무신 집권기 전주목의 사록에 제수되어 활동했던 이규보가 작성한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를 보면 사록의 관심사가 매우 넓고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외관 중에서 선발하여 외사직을 겸임시켰다. 그러나 건국 초기에는 논의만 되고 설치되지 못했다. 이는 고려조의 사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의정부나 육조, 승정원 소속의 훈구 대신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초기에 훈구 대신들이 외사 설치를 반대한 이유는 이미 사국(史局)이 설치되어 겸관이 갖추어졌으며, 땅이 좁기 때문에 외사를 설치하지 않아도 사방의 풍속과 인물의 선악을 들을 수 있고, 외사의 직필을 얻기 어렵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반대 이유는 사림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속셈이 더 컸다.
훈구 대신과 왕의 의지 결여 등으로 무산되었던 외사의 설치 논의는 중종 때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1513년(중종 8) 지방에서 장오(贓汚)의 죄를 저지르는 관리가 많다는 보고가 있었을 때 ‘민간의 고통과 수령의 인품, 풍속의 선악이 기록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령과 도사 중 외사직을 겸임시켜 기록하게 한다면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며 설치 논의의 단서를 제공하였다. 이듬해 10월 대사간 최숙생도 외사 설치의 필요성을 상언하였다[『중종실록』 9년 10월 25일].
1515년(중종 10) 윤4월 대사헌 권민수는 왕의 교화가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고 백성들의 탄식이 그치지 않으며 장마와 가뭄 등 재변이 끊이지 않는 것은 조정에 여러 문제가 있고 왕이 근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상언하였다. 5월까지 각종 재변이 계속 보고되자 대간들은 단순한 재변으로 인식하지 않고 수령의 정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백성과 가장 친근한 관리는 수령인데 지금의 수령은 청렴 근신한 자가 적고 탐혹한 자가 많아서 백성에게 혹독하게 착취하기 때문에 재변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도사와 수령 중에 외사를 겸임시켜 사실에 근거하여 바른대로 기록하게 하고 선악을 후대에 전하여 교훈이 되게 하면 수령의 정사가 바로 서고 권선징악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대간의 논의 이후 대신들은 선대에 없던 일이기는 하지만 대간의 건의대로 한다면 재변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 도의 수령과 도사 중에 한두 명을 선발하여 겸임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뒤 각 도 관찰사에게 외사 설치의 유시(諭示)를 내림으로써 계속된 재변의 문제는 일단락되었다[『중종실록』 10년 6월 26일].
외사는 호구 수, 날씨 등 각각 보고 들은 실상에 따라서 원사(原史)에 근거할 만한 것을 기록했고, 날씨의 상태뿐만 아니라 민물, 풍속과 기타 기록할 만한 일들을 옛 규례에 따라 기록하였다. 이들이 작성한 문서 중 춘추관에 보고된 것은 경외의 대소 아문에서 보고된 문서와 함께 시정기(時政記)로 작성되어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시 이용되었다.
외사의 보고가 정기적인 것이었는지는 기록의 미비로 알 수 없다. 그런데 「춘추관일기」가 5월이나 11월에 끝난 것으로 보아 수령의 고과(考課)가 있던 6월과 12월에 1개월 단위의 공문서 형식으로 춘추관과 감사에게 보고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의 보고 문서가 춘추관뿐만 아니라 감사에게도 보고된 것으로 보아 지방 사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어사처럼 수령에 대한 직무 감찰의 성격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지방 사관을 의미하는 외사를 야사(野史)의 의미로 표기한 경우가 있다. 따라서 외사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더라도 그 의미가 지방에서 사관직을 겸하고 기사를 작성하여 공문서의 형식을 갖춰 춘추관과 감사에 보고하는 겸춘추[外史]인지, 16세기 이래 지방에서 활발하게 나타난 사찬(私撰) 사서(史書)를 표현하는 야사인지, 아니면 재야에서 선비가 견문한 바를 기록해 놓은 개인 저술인지를 정확하게 구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