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의 어보는 왕과 왕비의 경우 ‘보(寶)’를, 왕세자 이하는 ‘인(印)’으로 구분하였고 재질도 전자의 경우는 금으로, 후자의 경우는 옥으로 제작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왕세자 이하의 책봉인을 흔히 옥인(玉印)으로 통칭하고 있다. 종묘에 봉안된 왕세자의 책봉인은 현종(顯宗)·숙종(肅宗)·경종(景宗)·진종(眞宗)·장조(莊祖)·순조(純祖)·문조(文祖)의 인장으로, 이 가운데 현종과 문조의 인장은 1995년 이전에 유실되었다. 왕세제의 인장은 현재 영조(英祖)의 책봉인 1과만이 전하는데, 이는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었음을 반영한다.
왕세손의 인장은 현종·정조(正祖)·헌종(憲宗)의 책봉인이 있었고, 정조·헌종의 인장이 현존한다. 인문(印文)은 모두 당시의 책봉명인 왕세자, 왕세제, 왕세손에 ‘인’ 자를 더하여 ‘왕세자인’, ‘왕세제인’, ‘왕세손인’으로 제작하였다. 아직 보위(寶位)에 오르지 않았으며, 왕과 왕비 이상이 쓰는 ‘보’ 자와 구분하기 위해 인문은 ‘왕세자보’가 아닌 ‘왕세자인’으로 한 것이다. 인꼭지는 모두 귀뉴(龜鈕)이고 재질은 옥으로 세자, 세제, 세손의 책봉인 양식은 귀뉴옥인으로 제작하는 원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크기는 약 10㎝로, 순조의 왕세자인은 13.7㎝로 매우 크게 제작된 특수 사례에 해당한다.
왕실의 여성도 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비가 되기 이전 왕세자빈, 왕세제빈, 왕세손빈으로 책봉되면서 책봉인을 받았다. 이때 제작된 인장은 책봉명 다음에 ‘지인(之印)’ 자를 붙여 ‘왕세자빈지인’, ‘왕세제빈지인’, ‘왕세손빈지인’으로 하였다. 세자, 세제, 세손과 달리 ‘지(之)’ 자가 붙은 이유는 글자 수를 짝수로 하여 인문을 제작할 때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고종대까지 종묘에 봉안된 왕세자빈의 인장은 1651년(효종 2) 명성왕후가 왕세자빈으로 책봉되면서 제작한 옥인으로부터 1727년(영조 3) 효순왕후가 왕세자빈으로 책봉되면서 제작한 옥인까지 총 7과이다. 인면의 크기는 대개 사방 10㎝를 넘지 않으며, 귀뉴옥인으로 제작하였다. 다만 인성왕후의 왕세자빈 책봉인과 효의왕후의 왕세손빈 책봉인은 은으로 제작되어 특수한 사례에 해당한다.
빈이 왕비로 책봉되면 이에 해당하는 인장을 제작하였고, 계비인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인장은 모두 책봉명인 왕비에 ‘지보(之寶)’자를 붙여 ‘왕비지보’로 제작하였다. 세자(세제, 세손)빈 책봉 때와 같이 귀뉴옥인이나 귀뉴은인으로 제작하지 않고 귀뉴금보로 하였다. 왕비로 책봉되는 동시에 인문은 ‘인’에서 ‘보’로, 재질은 옥이나 은에서 금으로 바뀌었다.
[내용 및 특징]
옥인을 제작하는 일련의 과정을 상세히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어람본 『옥인조성도감의궤(玉印造成都監儀軌)』가 있다. 이 의궤는 1735년(영조 11)에 효장세자빈 조씨가 현빈(賢嬪)이라는 호를 받게 됨에 따라 행해진 현빈궁옥인(賢嬪宮玉印)의 조성에 대한 의궤이다. 『해방의궤(該房儀軌)』에는 현빈궁 옥인 조성 당시의 품목(品目)과 옥인[현빈지인(賢嬪之印)]·인통대(印筒臺)·주통대(朱筒臺)·인록대(印盝臺)·주록대(朱盝臺)의 도설 및 그에 쓰인 물품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때 현빈의 옥인을 제작하기 위하여 공조 판서 윤순(尹淳) 등 3명의 당상관, 예조 좌랑 이석복(李錫福)을 비롯한 3명의 낭청이 참여하였다. 실무진으로는 진행 사항을 감독하는 별공작선공감감역관(別工作繕工監監役官) 1명, 옥인의 인문을 쓴 옥인전문서사관(玉印專門書寫官) 1명, 유사시를 대비한 차비관(差備官) 1명, 옥인을 진상할 봉옥인관(奉玉印官) 2명 등을 두었다. 또한 인문의 전사 및 도안에 필요하였을 서리, 서사관, 서원 등이 동원되었다.
옥인에는 이를 사용하고 보관하기 위한 관련 물품이 수반되었다. 예컨대 옥인을 감싸는 보자기인 겹복(裌袱), 보관을 위한 내함인 인통(印筒), 외함인 인록(印盝), 보안을 위한 쇄약(鎖鑰), 인주를 보관하기 위한 주통(朱筒), 주통을 보관하는 주록(朱盝), 주록을 담아 이동하는 호갑(護匣), 인장을 얹어 놓는 인안(印鞍) 따위가 그것이다.
의궤에는 이러한 물품을 만들어낸 장인의 명단까지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옥인 제작은 당시 당상관으로부터 장인에 이르기까지 총 65명이 참여하였을 정도로 매우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며, 여기에 참여한 장인들은 이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때 제작한 ‘현빈지인’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왕실의 책봉인을 옥으로 제작할 경우에는 주로 남양옥(南陽玉)을 선호하였다. 남양옥은 경기도 남양에서 산출되는 옥으로, 인장은 물론 편경·옥책 등 왕실 의례 관련 물품에 흔히 사용되었다. 남양옥으로 인장과 옥책을 만든 사례는 각종 『책례도감의궤(冊禮都監儀軌)』와 『상호도감의궤(上號都監儀軌)』에 상세하며, 악기를 만든 사례는 『악기조성청의궤(樂器造成廳儀軌)』에 보인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인조대 이후 왕실 의례 물품에 필요한 옥을 캐기 위해 옥장(玉匠)이나 차사원을 남양으로 보낸 기록이 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