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대명률』 「형률(刑律)」 인명편(人命編)에는 희살오살과실살상인조(戱殺誤殺過失殺傷人條)가 있는데, 희살(戱殺)은 장난을 치다가 타인을 살해한 것, 오살(誤殺)은 서로 싸우며 때리다가 실수로 옆 사람을 살해한 경우, 과실살(過失殺)은 예상치 못하게 실수로 사람을 살해한 것을 뜻한다. 그리고 오살(誤殺)한 자는 사형(死刑)에 처하지만, 애초에 고의(故意) 없이 타인과 싸우다가 옆 사람을 죽게 한 경우에는 교형(絞刑)에, 고의(故意)로 타인을 살해하려고 했으나 잘못하여 옆 사람을 살해한 경우에는 고살(故殺)로 논죄하여 참형(斬刑)에 처하는 것으로 구별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대명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오살(誤殺)과 과실살(過失殺)의 개념을 엄밀히 구별해서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이는 두 경우 모두 그 처벌이 사죄(死罪)로 차이가 없었던 것 때문인 듯하다.
1409년(태종 9)에는 전리(典吏)를 매질하여 죽게 한 중군총제(中軍摠制)를 오살하였다고 하여 귀양 보낸 사안이 있었다. 또, 이듬해 1410년에도 두 사람이 싸우다가 한 사람이 구타당하여 죽은 사안도 오살로 논하여 사죄(死罪)를 면해주었다. 1431년(세종 13)에는 활을 잘못 쏘아서 어린아이를 맞혀서 죽게 한 사안에 대해, 형조에서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미처 보고 듣지 못하여 오살(誤殺)한 율문"을 거론하며 살인죄로 논죄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데, 이는 과실살(過失殺)에 대한 『대명률』의 주석(註釋)이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오살(誤殺)은 과실살(過失殺)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오살(誤殺)이 『대명률』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사례로는, 1478년(성종 9)에 여종을 때리다가 안고 있던 어린아이를 죽게 한 사안이 있다. 이 사안에서는 율문에 따라 교형(絞刑)에 처할 것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성종(成宗)의 명으로 감형(減刑)되었다. 또한 1735년(영조 11)에 동생과 타인이 싸우는 것을 말리다가 형이 죽은 사안에서도 오살의 조문을 적용하여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 논의되었으나, 친형제 사이에는 죽일 의사가 없는 것이라는 형조 참판의 말을 따라서 유배(流配)시키는 것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