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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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閱武)

서지사항
항목명열무(閱武)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교열(敎閱)
관련어대열(大閱), 친열(親閱)
분야정치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우리나라 역대 왕조에서 행해진 열병의식(閱兵儀式) 및 군사훈련 검열제도.

[개설]
우리나라 역대 왕조에서 행해진 열병의식 및 군사훈련 검열제도로 넓은 의미로는 진법(陣法[戰術])·무예(武藝[戰技]) 훈련, 군사동원점검, 병기·군마점검, 사냥대회의 일종인 강무의식(講武儀式)·열병의식 등 전반적인 군사훈련 검열을 뜻하나, 좁은 의미로는 왕의 친림(親臨)하에 시행되던 열병식 및 전투훈련 참관으로서 대열(大閱) 또는 친열(親閱)을 의미한다.

[연원 및 변천]
교열은 신라 94년(신라 파사왕 15)에 알천(閼川)에서 처음 대열이 행해진 이래, 역대의 모든 왕조에서 시행되었다. 고려시대까지 크고 작은 교열행사가 수시로 행해졌으나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조선초기에는 교열보다 강무행사가 빈번하게 시행되다가 1426년(세종 8)에 살곶이[箭串]에서 처음으로 친열이 행해졌다. 세종은 1433년에 『진설(陣說)』을 찬술하게 하여 자세한 훈련과 교열의 규례를 마련하였다. 이것은 1451년(문종 1) 문종에 의해 보완되었고, 그 뒤에 『진법(陣法)』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왕이 참관하는 대열은 매년 9월이나 10월 중에 서울 교외에서 시행되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시대 왕이 참관하는 대열은 당일 좌우군이 교련장에 마주 포진한 뒤 대가(大駕)가 도착하면, 큰 나팔[大角]을 불어 개막을 알린다. 이어 좌우 두 대장이 오위(五衛)의 장수들을 불러 선서하기를, “이제 대열을 행하여 사람들에게 전투법을 교련하는데, 진퇴좌우를 일체 병법과 같이 하여, 명령에 따르면 상을 주고 명령을 어기면 형벌을 줄 것이니 힘쓸지어다.”라고 하면, 오위의 장수들은 각기 그 위치에 돌아가 이 내용을 전달한다. 이어 대가 앞에서 큰 나팔을 불고 기[麾]를 지휘하여 진을 형성하면, 대포를 쏘고 전투나팔[戰角]을 불어 여러 형태의 진법을 차례로 훈련하게 된다. 이러한 열병의식은 전투훈련 및 검열의 의의도 있었지만, 왕에 대한 군대의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기도 하였다.

한편 넓은 의미의 교열은 일체의 군사훈련과 검열제도를 뜻하는데, 『경국대전』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 주요사항을 살펴보면, ① 서울의 군대는 매월 2일과 16일에 진법훈련[習陣]을 실시하게 하였다. 왕이 참관할 수 없을 경우에는 위임받은 장수가 그것을 진행하게 되는데, 병조에서 그 성적을 기록하여 보고하고 연말 인사고과에 반영하였다. 지방군은 농사철을 제외하고 매월 16일에 소부대별로 진법을 훈련하며, 2월과 10월에는 대부대 단위로 진을 바꾸어가며 훈련하게 하였다. ② 4계절의 끝 달에는 병조와 도총부의 당상관 및 군기시(軍器寺)의 책임자 각 1인이 교외에서 화포 사격을 훈련시키고, 지방에서는 각 부대장[鎭將]이 사격훈련을 시키도록 하였다. ③ 2월과 9월의 20일에는 병조와 도총부 당상관들이 각 부대의 병기를 점검하게 하였다. ④ 병조와 도총부의 당상관들은 수시로 번상군사(番上軍士)와 말의 동원 상태를 점검하게 하였다. ⑤ 근무 중이 아닌 군사를 사흘 가운데 하루는 훈련원에 나가 진법이나 활쏘기 훈련을 받게 하며, 그 성적을 시험하여 화살을 표적에 맞힐 때마다 특별 근무일수로 가산해주었으며, 훈련에 불참한 자는 매를 때리게 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여기에 몇 가지 사항이 더 첨가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국왕이 친림하여 열병할 때에는 선전관과 교련관도 함께 참석하게 하였다. ② 삼군문(三軍門), 즉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은 매월 3회씩 정해진 날짜에 교외에서 진법을 훈련하도록 하였다. ③ 남한산성의 삼영(三營), 즉 수어청의 전·중·후영과 그 좌우부는 각각 관할지역에서 봄·가을 윤번으로 훈련한 뒤, 모여서 연합작전훈련을 실시하게 하였다. ④ 병마절도사는 지방을 순시하며, 각 읍의 속오군(束伍軍)과 세초군(歲抄軍)을 점검·사열·시험하며, 병사의 유고 시에는 영장(營將)이 대리하게 하였다. ⑤ 흉년이 되어 대훈련을 정지할 때에는 각 읍의 군사를 관문에 집합시켜 훈련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육군본부, 1968·1977.
■ 차문섭, 『조선시대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집필자] 박재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