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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 등은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좀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역제(驛制)의 정비를 서두르는 동시에 역(驛)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경제적 토대를 서둘러 마련하였다. 그 결과 고려 후기의 역전(驛田) 분급 규정을 토대로 한 새로운 규정을 제정하였다. 그렇지만 고려말 당시에는 양전(量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므로 역전이 규정대로 절급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조선건국 이후 역제의 정비와 병행하여 역전을 정비하는 작업도 꾸준히 추진되었다.
특히 1445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田制改革)을 거치면서 여러 국가기관의 절속지(折屬地)와 유역인(有役人)들의 구분전(口分田)이 대부분 혁파되면서 국가 수세지(國歌收稅地)로 전환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전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마침내 『경국대전』에서는 역공수전(驛公須田)·장전(長田)·부장전(副長田)·급주전(急走田)·마전(馬田)·역관둔전(驛官屯田)으로 정비되었다. 조선초기의 정권 담당자들이 역을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제도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역의 원활한 유지와 운영을 위하여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2. 역전의 내용
역에 분급된 전지(田地) 가운데 역의 공무 수행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공수전은 고려말 전제개혁 이후 조선초기를 거치면서 몇 차례에 걸쳐 축소·절급되었다. 국가 재원의 분산을 막으면서 인민과 전지에 대한 국가의 직접 지배력을 강화시키고자 그렇게 한 것이었다. 대신 부족해진 역의 운영 재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세조 때부터 일반 군현과 마찬가지로 역에도 관둔전을 절급하기 시작했다.
역리(驛吏)·관부(館夫)·전운노비(轉運奴婢)·급주노비(急走奴婢) 등 역에 소속된 유역인들의 경우 3명의 정(丁)을 하나의 호(戶)로 편제하여[三丁一戶] 그 호수(戶首)에게 구분전(口分田)을 지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부·전운노비·급주노비와 조역노비(助役奴婢)에게는 수세권(收稅權)을 매개로 하는 구분전 외에 소경전(所耕田)을 별도로 절급하였다. 마전[馬位田]의 절급 대상자는 원칙적으로 역리였으나, 역리의 사망이나 유망 등으로 입마(立馬) 대상자가 부족하게 되면 역 부근에 거주하는 평민, 역리·역녀와 공천(公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 역리와 함께 거주하는 매부나 사위 등을 입마 대상자로 선정하여 마전을 절급하기도 하였다.
3. 역전의 소유와 경영
역에 절급된 공수전과 역 소속 유역인들에게 절급된 구분전, 그리고 마위전은 모두 민전(民田) 위에 설정된 수세지(收稅地)였다. 동시에 역공수전·구분전·마위전으로 설정된 전지의 소유·경작자는 원칙적으로 역리를 포함한 역 소속 유역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역전은 역 소속 유역인들의 소경전 위에 설정되었던 것이다.
역리는 역공수전과 역리구분전(驛吏口分田)으로 설정된 전지의 소유·경작자로서 역공수전세의 납세자인 동시에 역리구분전의 수세자(收稅者)였으며, 관부와 전운노비·급주노비는 자신들의 구분전이나 역공수전으로 설정된 전지를 소유·경작하면서 동시에 역공수전세의 납세자와 구분전세(口分田稅)의 수세자였다. 그리고 조역노비는 역공수전이나 역 소속 유역인들의 구분전으로 설정된 전지를 소유·경작하면서 역공수전세나 구분전세의 납세자로 존재하였다. 한편, 입마 대상자는 마위전을 소유·경작하면서 역마를 사육하는 동시에 마위전세(馬位田稅)를 역에 납부하였다.
4. 역전의 경영 변화
역전은 원칙적으로 역 근처의 전지를 절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역 근처에 마땅한 전지가 없을 경우에는 역 근처의 민전을 강제로 수용하여 역전으로 절급하였다. 또한 양전(量田)으로 원래 절급받은 전지의 자호(字號)가 바뀌어도 다른 기관이나 사람들에게 절급된 전지들과는 달리 원래의 자호에 따라 이동하지 않고, 자호를 바꾸어서 본래의 위치를 그대로 절급받았다.
국가의 이러한 역전정책은 당연히 인민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거기에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역 소속의 유역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국가의 통제력이 강력하게 미치지 못했던 일반민들까지 입마인(立馬人)으로 차정(差定)되고 있어서 국가에서는 입마인과 마위전 관리가 한층 어려워지고 있었다. 때문에 국가는 역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 입마인과 마위전에 대한 관리를 강화시켜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국가는 역공수전과 유역인들이 절급받았던 전지를 소유·경작과는 분리된 각자수세(各自收稅)의 민전(民田)으로 전환하여 인민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는 한편, 마위전을 자경무세(自耕無稅)의 공전(公田)으로 규정하여 국가의 관리를 보다 강화시킴으로써 국가의 역 운영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였다.
5. 전세 수취 체계와 재정 운영
역전으로부터의 전세(田稅) 수취는 역리가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역승(驛丞)이나 찰방(察訪)이 이들을 감독하였다. 그리고 관찰사는 다시 이들을 통제하였다. 동시에 중앙정부는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관찰사-역승·찰방-역리로 이어지는 역전의 전세 수취 체계를 감독하고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는 역 운영 체제를 좀더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가고자 하였다.
역 재정의 실무 담당자는 역에 거주하고 있는 역리들이지만, 1차 책임자는 역승이나 찰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출납 운영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관찰사의 통제 아래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전세 수취뿐만 아니라 지출도 정해진 규정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출납에 관한 내역은 중기(重記)에 기록하여 중앙정부의 감찰을 받았다.
역공수전세와 역관둔전으로부터의 소출은 무엇보다도 조선과 중국을 왕래하는 양국 사신들과 각 지방으로 파견되는 봉명사신(奉命使臣)들의 지대(支待) 비용으로 가장 많이 지출되었다. 그 밖에도 역 관사(館舍)의 유지·관리 비용이나 찰방·역승의 판공비, 그리고 종이 구입 등과 같은 역의 공무 수행을 위한 비용 등으로 지출되었다. 구분전세는 역 소속 유역인들의 출장비 등과 같은 공무를 수행하는 비용으로 지출되었으며, 마위전세는 평상시의 역마 사육비, 공무를 수행중인 역마의 초료(草料)나 새로운 역마의 구입 비용 등으로 지출되었다.
그런데 역의 재정 지출 규모는 매년 일정하거나 더욱 증가하였음에 불구하고 역전으로 부처의 수입이 항상 부족한 형편이었다. 무엇보다도 당시는 자연재해 등을 극복할 수 있는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매년 일정한 생산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조선초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빈번하게 지방으로 각종 봉명사신들을 파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찰방·역승 등의 작폐와 세력가들의 역전 침탈도 역 재정을 악화시켰다.
그 결과 과중한 부담을 견디지 못한 역 소속 유역인들이 유망하는 사태가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국가는 이를 막아 보고자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지만, 모두 근본적인 개혁책이 아닌 임시 미봉책에 불과하여 역의 재정 문제는 끊임없는 악순환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전으로부터의 수입이 지방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가장 컸다. 말하자면 역전으로부터의 수입은 국가의 지방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재원으로 기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