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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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로(驛路)

서지사항
항목명역로(驛路)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역도(驛道), 속역(屬驛), 합배(合排), 관로역승(館路驛丞), 찰방(察訪), 역리(驛吏), 관군(館軍), 참로찰방(站路察訪)
분야경제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사람과 물자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역을 매개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한 교통로.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명과 공문서의 전달, 사신의 영송 및 접대, 관수 물자의 운송, 역마와 숙식의 제공 등을 목적으로 역참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역(驛)과 역 사이를 연결하여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는 데 필요한 역로(驛路)를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역도(驛道)-속역(屬驛) 체계를 확립하여 역로를 설치하였다. 그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천도한 뒤 한양을 중심으로 역로를 재편하여, 중앙 집권적 양반 사회를 지탱하는 동맥 역할을 하게 하였다. 역의 신설과 이설 및 통합을 추진했으며, 이식제(里息制)에 따라 6척(尺)을 1보(步), 360보를 1리(里), 30리를 1식(息)으로 정하여 역을 설치하는 규정으로 삼았다. 특히 4군 6진 설치와 서해안 및 남해안의 왜구 출몰, 명나라 및 일본과의 사대교린에 따른 사신 왕래 등으로 역로의 확대가 필요했으며, 그에 따라 역도를 개편하거나 신설하여 전국적인 역로망을 구축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왕조는 기본적으로 고려시대의 역제(驛制)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한양 천도와 그에 따른 역의 신설과 이설 및 통합, 서북면과 동북면의 개척, 서해안과 남해안의 왜구 토벌, 군현의 행정 구역 개편 등으로 인해 역로를 새롭게 재편하였다.

그리하여 첫 번째로 한양 천도 이후 한양과 의주를 잇는 역로를 개편하였다. 그 중에서도 한양에서 개성에 이르는 영서(迎曙)·벽제(碧蹄)·마산(馬山)·동파(東坡)·청교(靑郊)·산예(狻猊)·중련역(中連驛)을 연결하는 영서도(迎曙道)를 가장 먼저 개편하였다. 이들 역은 고려시대 6과 체제에 속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대(對)중국 교통로이자 사행로로서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 결과 <표1>에서 보듯이 『대전속록(大典續錄)』에 대로역(大路驛)으로 분류되었다. 개경과 서경을 잇는 역로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6과 중에서도 1과에 편성되어 대로역에 해당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중로역(中路驛)으로, 평양에서 의주까지의 역들은 소로역(小路驛)으로 분류되었다.


의주 방면의 역로는 대중국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교통로였기 때문에 개편을 단행하였다. 평안도 지역의 역은 ‘관(館)’이라 고치고, 의주 의순관(義順館)부터 중화의 생양관(生陽館)까지를 대동도(大同道)라 하여 관로역승(館路驛丞) 또는 찰방(察訪)을 파견하였다. 이곳에는 역리(驛吏)가 없었기 때문에 관군(館軍)을 뽑아 사신 접대를 맡겼다. 황해도의 경우 역을 ‘참(站)’이라 부르고, 황주의 경천참(敬天站)에서 금천의 금교참(金郊站)까지를 금교도(金郊道)로 삼아 참로찰방(站路察訪)을 임명하였다.

또 4군 개척에 따라 삭주·강계 방면의 역로를 새로 개설하였는데, 영변 어천역(魚川驛)에서 삭주의 소삭역(小朔驛), 이산의 앙토역(央土驛), 만포의 만포역(滿浦驛)을 연결하는 어천도(魚川道)가 그것이다. 그밖에 고려시대의 주요 역로였던 서흥~황주간의 절령로(岊嶺路)가 쇠퇴하고, 그 대신 봉산의 동선역(洞仙驛)검수역(劒水驛)을 지나는 극성로(棘城路) 또는 황주로(黃州路)가 발달하였다. 이처럼 한양과 의주를 잇는 역로는 군사적인 측면보다는 사행을 위한 교통로로서 더 많이 활용되었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두 번째 역로상의 큰 변화는 한양과 동북 지방의 온성을 연결하는, 경기도 지역의 녹양역(綠楊驛)·안기역(安奇驛)·양문역(梁文驛)으로 편성된 평구도(平丘道)와 강원도 지역의 풍전역(豊田驛)·생창역(生昌驛)·창도역(昌道驛)·신안역(新安驛)·은계역(銀溪驛)이 소속된 은계도(銀溪道)를 신설한 점이다. 동북 지방의 역로는 군사 요충지인 함경도 지역을 도성인 한양과 연결하는 교통로이자 여진족이 왕래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컸다. 그에 따라 1398년(태조 7)에는 정도전을 동북면에 파견하여 군현을 새로 정비하면서 역참을 개편하였다. 홍원의 신은참(新恩站)·평포참(平浦站), 청주(靑州)의 오천참(五川站)·거산참(居山站), 단주(端州)의 시리참(施利站)·기원참(碁園站)·마곡참(麻谷站), 길주의 임명참(臨溟站)·약수참(藥水站)·명원참(明原站), 경성의 주촌참(朱村站)·오촌참(吾村站)·용성참(龍城站)·부가참(富家站), 경원의 시원참(時原站)·옹구참(翁口站)·강양참(江陽站) 등이 이때 개명되거나 신설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의 산예역에서 동북방 선덕진의 선덕역(宣德驛)까지만 역로가 개설되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홍원의 신은참부터 경원의 강양참까지 역로가 확대된 것이다.

세종대에는 4군 6진의 설치를 계기로 북방 개척에 주력하여, 단천군에 곡구참(谷口站)을, 길주목에 웅평역(雄平驛)을 추가로 신설하였다. 또 1432년(세종 14)에는 영북진(寧北鎭) 등 6진의 설치를 계기로 이 지역의 진보(鎭堡)와 군현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경원의 마유참(馬乳站), 종성의 무안참(撫安站)·농교참(農郊站)·역산참(櫟山站)을 신설하였다.

1425년(세종 7) 5월에는 개성에서 철원에 이르는 도원(桃源)·구화(仇和)·백령(白嶺)·상수(湘水)·단금(丹金)·옥계(玉溪)·용담(龍潭) 등의 역을 신설하고, 양주에서 회양에 이르는 역의 합속(合屬)한 것이 대북방 역로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풍천역(豊泉驛)과 전원역(田原驛)을 합하여 풍전역, 도창역(都昌驛)과 생안역(生安驛)을 합하여 생창역이라 하고, 금성현의 통도역(通道驛)과 웅창역(熊昌驛)은 창도역, 회양의 신양역(新揚驛)과 동안역(東安驛)은 신안역으로 통합함으로써 한양 천도 이후 동북 지방의 역로를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양주의 녹양역과 포천의 안기역, 영평의 양문역을 대로역으로, 철원의 풍전역을 비롯해 생창·직목(直木)·창도·신안·은계역과 함길도 온성의 덕명역(德明驛)을 중로역으로 분류하였다. 이 지역의 중요성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한양 도성에 역로를 개설하고, 하삼도 지역의 역로를 재편하였다. 한양에는 돈화문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영서역(迎曙驛), 남쪽으로 청파역(靑坡驛)·양재역(良才驛), 동쪽으로 평구역(平丘驛), 북쪽으로는 노원역(蘆原驛)으로 연결되는 역로를 신설하였다. 또 고려시대의 광주도(廣州道)에 속한 역들을 부분적으로 계승하여, 한강 나루 건너 양재역-낙생역(樂生驛)-구흥역(駒興驛)-금령역(金嶺驛)-좌찬역(佐贊驛)-분행역(分行驛)-무극역(無極驛)을 지나 충주의 단월역(丹月驛)으로 연결되는 경안도(慶安道)를 확립하였다. 도성에서 충청도와 경상도로 이어지는 이 역로는 한양과 일본을 연결하는 직로(直路) 역할을 하였다.

또 도성을 방문하는 일본 사신의 수가 늘어나자, 상경로를 분산하기 위하여 1432년(세종 14)에는 부산포(富山浦)에서 상주·문경을 지나 연풍·괴산과 음성·음죽·이천·광주와 광진을 거치는 역로와, 제포(薺浦)에서 성주·옥천·청주·진천·죽산·용인·한강도 그리고 염포(鹽浦)에서 출발하여 안동과 영천·단양·충주·여흥·양근·평구역을 경유하는 노선을 확정하였다. 그 결과 양재도 외에 경안도, 평구도의 역로가 발달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역로 변화 중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왜구를 막기 위해 서해안과 남해안에 설치한 진보와 수영 및 감영을 연결하는 군사적, 행정적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역참을 신설하고 역로를 재편한 점이다. 인천과 그 인근에는 경신역(慶信驛)·반유역(盤乳驛)·석곡역(石谷驛)·금륜역(金輪驛)·종생역(終生驛)·남산역(南山驛) 등을 신설하여 중림도(重林道)를 개편하였고, 서해안 충청 지역에는 풍전역(豊田驛)·세천역(世川驛)·용곡역(龍谷驛)·두곡역(豆谷驛)·신곡역(新谷驛) 등을 신설하여 금정도(金井道)·시흥도(時興道)·이인도(利仁道) 등의 역도를 재편하였다. 또한 남해안 지역에는 남해의 덕신역(德新驛), 거제의 오양역(烏壤驛), 해남의 남리역(南利驛) 등을 다시 설치하여, 남해안 방어를 위한 역로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게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의 역로 개편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고려시대의 22역도-525속역 체제가 41역도-543속역 체제로 분화된 점과, 15세기 이후 군현의 통폐합에 따른 역의 이설 및 통합 등을 들 수 있다. 무주현의 소천역(所川驛), 수원의 청호역(菁好驛) 외에 양산의 위천역(渭川驛)을 덕산역(德山驛)으로, 밀양의 양동역(良洞驛)을 용가역(龍駕驛)으로 이설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또 평안도, 함길도의 압록강~두만강 연안에 임시로 설치된 강계(江界)에서 개천(价川)의 9개 합배(合排)와 여연(閭延)에서 운산(雲山)까지의 27개 합배가 설치되었다. 역의 잡무를 돕게 하기 위해 함길도·평안도의 군사적 요지에 특별히 마련되었던 합배는 점차 역참으로 개편되었다. 또 역로를 교통로로서의 중요도에 따라 대로·중로·소로로 나누고 그에 따라 역전(驛田) 및 역속(驛屬)에 차이를 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호남 지방의 경우 나주목과 광주목, 순천도호부나 장흥도호부와 강진 병마절도사영,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을 연결하는 간선 교통로의 발달에 따라 역로를 재편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영산강 서쪽 방면을 중시한 데 비해, 조선시대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서해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역을 신설하고 역로를 확대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속록(大典續錄)』
■ 『해동지도(海東地圖)』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유선호, 「조선초기의 驛路와 直路」, 『역사교육』70, 1999.
■ 정요근, 「고려시대와 조선전기 전남지역의 역로망 구성과 그 특징」, 『지방사와 지방문화』13-2, 2010.
■ 정요근, 「조선초기 역로망의 전국적 재편-교통로의 측면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46, 2008.
■ 조병로, 「조선후기 광주지역의 교통로와 산성취락의 발달」, 『인문과학』7, 2000.

■ [집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