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여기(女妓)는 주로 왕실의 잔치, 의식, 행행(行幸) 등에서 음악과 춤을 담당하였으며, 여악(女樂)이라고도 한다. 여령(女伶)·여공인(女工人)·기생(妓生)·창기(娼妓)·관기(官妓)의 용어로도 쓰였다. 여기의 신분은 관노비(官奴婢)이며, 지방에서 3년마다 150명씩 뽑아서 중앙으로 올려 보냈다[選上]. 이러한 여기들의 신역(身役)은 국가의 크고 작은 연향에서 악가무를 공연하거나 의장(儀狀)을 들고 시위하는 일이었으며, 50세가 되어야 기역(妓役)에서 벗어났다. 여기들에게는 1년에 두 차례 쌀이 지급되었고 봉족(奉足)도 제공되었다. 연향을 마친 후에는 그 대가로 연폐(宴幣)가 주어졌는데, 등급에 따라 면포 2필에서 1필까지 차등 지급되었다. 한양에서 활동하는 여기를 경기(京妓)라 불렀으며, 지방에서 활동하면 향기(鄕妓) 혹은 외방여기(外方女妓)라고 불렀다.
[담당 직무]
여기는 국초에는 악학도감(樂學都監)에서 재예(才藝)를 배웠으나 성종 이후로는 장악원(掌樂院)에 소속되어 학습과 활동이 이루어졌다. 여기는 회례연·양로연 등 연향과 격구(擊毬)·매사냥·관사(觀射)와 같은 소소한 여흥에 참여하여 악가무를 하였다. 또한 왕이 신하들에게 연향을 베풀어줄 때 내려주는 음악을 사악(賜樂)이라 하는데 이때에도 여기가 악을 담당하였다. 여기는 내·외명부 여성들이 중궁에게 하례를 올리거나 친잠례(親蠶禮)를 시행할 때 음악을 연주하고 의장(儀狀)을 드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왕이 친경례(親耕禮)·순행(巡幸)·능행(陵幸)·온행(溫行) 등에서 돌아올 때 환영하는 가요도 올렸다.
한편 외방여기들은 명나라 사신이 오가는 길목인 평안도, 여진인이 왕래하는 함경도, 왜사(倭使)가 오가는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그들을 대접하는 연향을 행할 때 악가무를 하였다. 그리고 변방 지역의 군사를 위로해주었고, 지방관아의 연향에서 악가무를 공연하였다.
[변천]
연산군대에는 여기의 수요가 커지면서 장악원에서 여기를 검열하도록 하였고[『연산군일기』 10년 7월 6일], 여기에게 짧은 옷을 입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6월 14일]. 젊고 예쁜 여기들을 중앙으로 바치게 하였으며 이를 어기는 수령을 논죄하였다. 재주와 용모가 없는데도 예조(禮曹)가 장악원에서 청탁을 받아들여 올리는 경우도 함께 처벌하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7월 15일].
여기는 국가의 다양한 행사에서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하였고 왕의 행차를 맞이하여 가요를 불렀지만, 부묘(祔廟)한 후 환궁할 때에는 가요를 바치지 못하도록 하였다[『문종실록』 2년 3월 8일]. 한편 흉년이 들었을 때는 여기를 정지하고 뜻에 따라 놓아 보내주었는데, 1444년(세종 26)에는 여기의 정원을 줄이고 각자 원하는 대로 나가 살도록 하는 조처를 취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6년 7월 26일].
여기가 갖추었던 가무 등의 기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2품 이상 관원의 첩이 되어 속신(贖身)을 할 수 있더라도 이를 금지하였으며, 특히 사신이 왕래하는 지역에서는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 등도 첩으로 삼지 못하게 하였다[『성종실록』 24년 11월 8일]. 또한 혼인한 여기라도 주악(奏樂)에는 참여하도록 하였으며[『연산군일기』 11년 1월 1일],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를 연화대(蓮花臺)에 소속시켜 악공(樂工)이나 무동(舞童)으로 그 업을 세습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8년 3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