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양수척(楊水尺)은 후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존재하였던 천업(賤業)에 종사하던 무리로, 일명 수척(水尺)·화척(禾尺)·무자리라고도 한다. 변경 지대에 주로 많이 살았고 떠돌아다니면서 사냥과 유기(柳器: 고리)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1423년(세종 5)에 이들의 명칭이 ‘백정(白丁)’으로 바뀌었다.
[담당 직무]
고려시대 최충헌(崔忠獻) 집권기에는 흥화도(興化道)·운중도(雲中道) 등의 양수척에게 공물을 과다하게 징수하자 반발이 있었다. 몽고에 의해 멸망당한 요(遼)의 잔당인 거란유종(契丹遺種) 금산왕자(金山王子)·금시왕자(金始王子) 무리가 침입하자 이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변천]
양수척이라는 호칭은 1423년(세종 5) 병조(兵曹)의 제의에 따라 고려시대의 일반 농민을 의미하는 ‘백정(白丁)’으로 바뀌었으나, 그 신분은 여전히 천인으로 존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양수척을 일반 농민과 섞여 살도록 하고 각 관의 일수(日守), 서원(書員), 의율생도(醫律生徒)와 함께 잡색군(雜色軍)으로 편성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25일]. 그러나 양수척은 이전과 같이 도적질을 하고 배반을 하기도 하며 적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향도(嚮導) 노릇을 하기도 하여, 양성지(梁誠之)는 그들이 관장(官長)을 고발하지 못하게 하도록 단속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예종실록』 1년 6월 29일].
『중종실록』 기사에서는 양수척에 대해서 "우리나라에 별종 인간이 있어서 사냥이나 유기를 만들어서 생업으로 하고 있는데, 호적에 올라 있는 백성들과 달라서 ‘백정’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전 왕조의 양수척이다[我國有別種人 以射獵結造柳器爲業 異於編氓 名曰白丁 卽前朝之揚水尺]."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중종실록』 5년 8월 4일]. 이는 이후 양수척이라는 명칭이 잘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