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조선시대 정치범 등에게 조정에서 시행한 가혹한 고문의 하나로, 무릎을 꿇게 하여 그 위에 널을 올려놓고 무릎을 짓밟는 고문.
[개설]
압슬(壓膝)은 누를 압(壓), 무릎 슬(膝)로서, 글자 그대로 피의자의 무릎을 밟아서 고통을 안겨주는 고문이다. 조선초기부터 조정에서 역모 등에 연루된 피의자에게 신장으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할 경우에 특별히 사용하던 고문 방법의 하나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압슬은 죄인에게서 효과적으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시행된 고문 방법인데, 정확히 언제 처음 시행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충렬왕 때에 심양(沈諹)이란 자를 문초하면서 나무토막을 다리 위에 놓고 노끈으로 묶은 다음 기왓장을 다리 사이에 끼워 사람을 시켜 번갈아 그 위를 밟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에 이미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때에 이미 압슬형을 시행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조선 초기부터 조정에서 죄인을 심문할 때 사용하였다. 압슬을 시행하면서 관련 규정도 마련되었는데, 1415년(태종 17)에는 압슬을 가할 때 널에 올라가 밟아대는 사람을 처음에는 2명으로 제한하였고, 그래도 자복하지 않으면 두 번째에는 4명, 세 번째에는 6명까지 올라가서 밟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7년 5월 11일]. 그리고 역모나 패륜, 강도, 살인과 같은 중죄인 외에는 압슬을 함부로 시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무릎을 망가뜨리는 등 고문 후유증이 제법 컸기 때문이다.
[내용]
압슬 방법은 먼저 자갈을 널 위에 깔고 피의자의 무릎을 꿇게 한 뒤 다시 자갈을 부어 무릎 주위를 채워 넣은 후 그 위에 사람들이 올라설 수 있도록 새로운 널을 다시 올려놓는다. 그리고 형리 등 고문 집행관들이 그 위에 올라가 지근지근 짓밟아서 고통을 주는 고문이다. 울퉁불퉁한 돌에 놓인 무릎을 사정없이 밟아대니 당하는 사람의 고통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피가 솟아 땅으로 흐르기 예사였다. 그런데 압슬을 시행할 때 자갈 대신에 종종 사금파리를 깨뜨려 깔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압슬을 ‘압사(壓沙)’라고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조정에서 간간이 사용되던 압슬형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마지막 사례는 영조가 즉위한 다음해인 1725년(영조 1) 1월에 있었다. 영조가 당시 선왕인 경종의 능(陵)에 행차하던 중 군사 이천해란 자가 영조의 어가(御駕) 앞에 뛰어들어 큰소리로 경종 독살설을 제기하였는데,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조는 무려 24차례에 걸쳐 그에게 압슬을 가하고 그 날로 처형하였다. 이후 영조는 뒤늦게 이천해에 대한 심문이 너무 가혹했다고 후회하고 신하들에게 더 이상 압슬을 가해 심문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며, 이후 압슬형은 조선시대에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의의]
압슬형은 정치범에게 시행된 고문이므로 역모와 정쟁이 심했던 시기에 자주 시행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1589년(선조 22) 선조대 최대의 정치 사건인 기축옥사 때에는 어린아이에게도 압슬을 가해 논란이 되기도 하였으며, 취약한 명분을 가지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대에는 역모 사건에 압슬, 낙형 등 가혹한 고문이 자주 동원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정치범 수사 및 법률 문화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압슬형 시행 사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