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1392년(태조 1) 7월에 관제를 개편할 때 종3품의 강독관(講讀官) 4명과 정4품의 검토관(檢討官) 2명, 정5품의 부검토관(副檢討官)을 두었다. 태조대 후반 이후 강독관이 시강관(侍講官)과 시독관으로 불렸다. 1418년(세종 즉위)에는 지경연(知經筵) 1명과 동지경연(同知經筵) 1명, 시강관 1명을 더 두었으며, 1468년(예종 즉위)에는 낭관 6명만을 두고 모두 시강관으로 통칭하였다. 그 뒤에 정4품의 시강관, 정5품의 시독관과 검토관으로 분설하였다. 성종 이후에는 홍문관의 직제학(直提學)·전한(典翰)·응교(應敎)·부응교(副應敎)가 시강관을 겸임하였다.
[담당 직무]
시강관은 경연에 참석하여 경서를 강독하고, 치도(治道)를 밝히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홍문관의 관원들이 겸임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경연 본래의 임무뿐 아니라 언론 활동에도 깊숙이 관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변천]
조선시대에 광범하게 운영된 겸직제는 권력의 집중과 국가의 예산 절감이 주목적이었는데, 시강관 역시 이러한 겸직제의 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경연 겸관의 하나였다.
시강관은 정4품으로 홍문관의 전한·응교·부응교가 이를 겸임하였다.
성종대에는 세자의 교육이 충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시강관의 빈번한 교체에 따른 결과라는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즉 시강관으로 임명된 자는 자주 교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헌부 장령 유빈(柳濱)의 건의는[『성종실록』 25년 7월 17일] 이들의 임무가 상당히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1894년(고종 31) 관제 개정 때 경연청을 개편하면서 시강관이 시강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