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조선초기 수호군은 국왕과 왕비의 능침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임무를 담당한 군사였다. 당시 수호군은 서반(西班) 5품으로서 호군(護軍)에 올려 제수한 자를 말하였는데, 세종대에 이르러 수릉군(守陵軍)으로 하였다가[『세종실록』 27년 5월 6일] 다시 수호군이 되었다. 그러면서 수호군은 인근 지역 민인들의 역으로 채워졌다. 수호군의 배정과 규모는 시기마다 차이가 있는데, 중종대 헌릉(獻陵)의 수호군은 30여 호(戶)였으며[『중종실록』 10년 4월 13일], 성종대 창릉(昌陵)에는 수호군 70호가 있었다. 창릉에 배정되었던 수호군은 모두 광릉(光陵)의 예에 의거하여, 능에 가까운 경기 여러 고을의 부실(富實) 한역(閑役)한 사람들로 배정되었다. 따라서 능원묘의 수호군은 해당 지역의 민인들이 동원된 임무였음을 알 수 있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27일].
이후 조선말기까지 능원묘를 보호하는 임무는 수호군이 담당하였다. 특히 조선후기로 갈수록 수호군은 증가하고 그 담당 범위도 넓어지는데, 국왕들의 사친(私親) 추숭(追崇)에 따른 능원의 증가와 비빈(妃嬪)들의 묘소까지 관리하게 된 배경 때문이었다. 예컨대 조선후기 빈궁(嬪宮) 묘소의 경우에는 수호군 30명이 충정(充定)되었으며[『숙종실록』 44년 3월 29일], 영조대 순강원(順康園)에도 궁원(宮園)의 식례(式例)에 따라 수호군 30명을 두었다[『영조실록』 31년 6월 4일]. 그 밖에도 수호군은 능원묘와는 별도로 국왕과 왕비의 태실(胎室) 관리와 보호도 담당하였다[『성종실록』 8년 1월 5일].
[용례]
以靑海道人崔伯顔夫介等七戶 移置果州 爲貞陵守護軍 各給田二結 使之安業 伯顔夫介等爲惡不已 徙沿邊充軍[『태조실록』 7년 6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