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소유(所由)는 고려시대 어사대(御史臺)에 배속되어 형관(刑官)의 보조 역할을 했던 직임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관직이다. 사헌부에 딸린 관원으로 죄인을 잡아들이는 일을 맡아보았다. 병조(兵曹) 소관의 경아전(京衙前)이었던 나장(羅將)을 사헌부에서는 소유라 불렀던 것이다. 특히 사헌부 감찰(監察)의 업무를 뒷받침하기 위해 배속되면 감찰나장(監察羅將)이라고 하였다. 나장은 병조·형조(刑曹)·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전옥서(典獄署)에서는 사령(使令)이라 불렀으며, 사간원에서는 창도(唱導)라고 불렀다. 소유의 신분은 양인(良人)이지만 일이 고되어서 조선시대 ‘칠반천역(七般賤役)’ 중 하나였다. 급료는 병조에서 주었다.
[담당 직무]
소유와 같은 나장은 중앙의 사정(査正)과 형사 업무를 맡는 관서에 소속되어 경찰(警察)·순라(巡羅)·옥졸(獄卒)로서 사령잡역(使令雜役)에 종사하였다. 소유는 사헌부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감찰의 역할과 사람을 잡아들이는 역할을 하였다. 이때 소유는 첩(帖)을 가지고 령(令)을 범하는 사람을 잡아들일 수 있었다[『태종실록』 4년 1월 17일]. 이러한 소유의 역할은 나라의 금법을 어지럽히는 것을 막는 금란(禁亂)을 담당한 것이어서 소유를 금란영사(禁亂令史)라고도 하였다.
소유는 유배를 가게 된 죄인을 지인들이 감추어주는지 여부를 경계하여 지키는 임무도 담당하였다[『태종실록』 6년 6월 5일]. 한편 상인들 사이에서 저화(楮貨)가 사용되는지 여부를 은밀히 조사한다든지[『태종실록』 12년 7월 3일], 감찰과 함께 전세(田稅)를 수납하러 가는 것도 소유의 직무였다[『단종실록』 즉위년 10월 24일]. 그러나 이렇듯 백성들의 경제 상황을 살피는 등의 임무를 수행할 때는 이로 인한 폐단이 더 컸다. 저화 사용을 조사한다며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전세를 수납할 때 금란을 사칭하여 오히려 백성들을 침탈하였던 것이다.
[변천]
사헌부의 소유는 처음 50명이었다가 60명으로 늘었으며, 1443년(세종 25)에는 30명을 더하여서 90명을 정액으로 삼았다. 이는 소유의 직무가 고되었기 때문이었다. 근무 방식은 매년 60명이 입번(入番)하고 30명은 1년 만에 서로 교체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5년 6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