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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성황신(城隍神)은 기본적으로 고을의 신이다. 천왕(天王), 산신, 무명의 장군 등 구체적인 인격체가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고려 이래로 그 고을의 토성(土姓)이나 토호의 시조·조상 중에 뛰어난 인물을 성황신으로 모셔왔다. 조선은 건국 초기 중국 명나라 『홍무예제』 등 각종 예서(禮書)를 참작하여 고려 이래로 군현 단위에서 행해져 온 성황신에 대한 제사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조선중기에 이르러 향권(鄕權)이 기존 토호에서 사족(士族)으로 교체되는 고을에서는 성황신도 부정되었거나 성황사와 함께 사라졌다.
[내용 및 특징]
성황(城隍)이라는 글자는 본래 『주역』 태괘(泰卦)의 상륙(上六) 효사(爻辭)에서 나왔다. 글자로 풀이하면, 성황은 해자[隍]의 흙을 파서 높이 쌓아 만든 성지(城池)다. 성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성황사를 만들어 옳게 죽지 못한 뭇 귀신을 제사지내도록 한 것이다. 송나라 사람 육유(陸游)가 지은 「진강부성황충우묘기(鎭江府城隍忠祐廟記)」에, 한나라 장수 기신(紀信)이 그 지방의 성황신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성황신으로 인물신이 모셔진 초기 사례로 보인다.
1430년(세종 12) 8월 6일 예조에서 산천단묘순심별감으로부터 보고받아 왕에게 올린 건의 내용 중 각 지방의 성황신과 관련된 기사들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전라도 전주의 성황신은 신상(神像)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것을 없애고 성황위판(城隍位版)을 만들어 전주부성황지신(全州府城隍之神)이라 쓰게 하였다. 영흥의 성황신은 남녀 6위의 목상(木像)이었다. 적성현 감악산(紺岳山)의 신은 위판(位版)이 없고 주신(主神) 가족 6위를 이상(泥像)으로 모시고 있었다. 송악산성황(松岳山城隍)은 이상(泥像) 4위였다[『세종실록』 12년 8월 6일].
『신증동국여지승람』 사묘조에는 각 고을의 성황신이거나 성황신이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 신숭겸(申崇謙)이 죽어 곡성현의 성황신이 되었다.
○ 세속에 전하기를 김홍술(金洪述)의 용모가 고려 태조와 비슷하였는데 후백제 견훤과의 전쟁에서 져서 죽임을 당했다. 이에 이곳 의성현에 성황사를 세웠다.
○ 김총(金摠)은 견훤의 부하가 되어 관직이 인가별감에 이르렀다. 죽어서 순천부의 성황신이 되었다.
○ 부리 손긍훈(孫兢訓)은 고려 태조를 도운 공이 있어 삼중대광사도로 추증되고 광리군(廣理君)으로 봉해졌으니, 즉 성황사신이라고 전한다.
신숭겸과 김총은 각각 평산신씨(平山申氏)와 순천김씨(順天金氏)의 시조이다. 김홍술은 의성김씨의 3세조로서 922년 의성부의 성주(城主)가 된 자이다. 손긍훈은 밀양손씨의 중시조(中始祖)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고려중기 이후 지방 토호로 성장한 성씨들의 시조들로서, 이들의 집단적인 세력에 힘입어 해당 지역의 성황신으로 모셔진 것이다.
[변천]
조선중기에 이르면 위와 같이 특정 성씨의 시조나 중시조가 성황신인 경우 그 신은 해당 성씨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성황신 자격을 유지하기도 하고 탈피하기도 한다. 특히 지방의 제의가 정치 세력의 판도에 따라 음사적인 경향에서 유교적인 경향으로 바뀌어가는 17세기 이후로는 정부에서도 후자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그 변화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함께 전란에 따른 재해에다 전염병이 자주 발생하는 상황에서 성황신에 대한 사전(祀典) 제사도 본래의 제도가 의도한 대로 관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음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는 사례들이다.
○ 1603년(선조 36) 3월 13일 전라도 장성 등 3개 읍에 여기(厲氣)가 치열하게 일어나 집안이 모두 망한 자까지 있었으므로 별도로 홍문관 교리 권진(權縉)을 보내어 성황당 등의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 1668년(현종 9) 3월 19일에 여역(癘疫)이 전국에 퍼지자 산천단과 성황단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또 중신(重臣)을 보내어 북교(北郊)에서 여제(厲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 1718년(숙종 44) 11월 20일에 전염병이 몹시 만연되고 있다고 하여 중신을 파견하여 산천에 치제(致祭)를 하도록 하고, 임금이 친히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의 축문을 지어 내렸다.
○ 1786년(정조 10) 4월 10일에 진두(疹痘)가 매우 심하게 유행하자 왕이 여제를 지내기 하루이틀 전에 날을 가려 향(香)을 받게 하여 성황신에 고하는 발고제(發告祭)를 지내도록 하교하였다.
성황신에 대한 제사는 대개는 지방 수령관이 주재하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주관하는 경우도 있었다. 1413년(태종 13) 10월 2일 태종은 영공안부사 이지(李枝)를 보내어 태조의 진전(眞殿)에 제사를 지내고, 또 중관 김수징(金壽澄)을 보내어 완산의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수령의 주재로 올리는 성황제의 시기는 봄·가을로 2회이며, 역시 봄·가을의 두 차례 여제 때도 성황신에게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그런데 조선 이전부터 지방 토호들이 주관해 온 성황제의 시기는 대개 단오 때로 나와 있다. 그러한 유형의 성황제는 대개 고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축제의 성격을 띠었다. 단오절은 보리 추수를 마친 다음에 갖는 농민 행사이다. 그런데 조선중기까지 대부분의 지역이 수전(水田)보다 한전(旱田)의 비율이 높았던 점을 감안할 때 성황제를 단오절이나 그 즈음에 지낸 것은 농사와 세시의 주기를 맞춘 것임을 알 수 있다.
1992년 전라북도 순창군의 순창설씨 제각(祭閣)에서 발견된 ‘성황대신사적(城隍大神事跡)’ 현판에 기록된 내용은 순창 지역 성황제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563년의 성황제의 상황을 묘사한 현판 기사 중에 "……윤정우향리오인각자기가설당대왕솔부인표기대기(輪定于鄕吏五人各自其家設堂大王率夫人表其大旗)"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향리 5인이 돌아가며 자기 집을 당으로 차려놓고 대왕신을 대모산신(大母山神)인 부인과 함께 모시는데, 대기(大旗)로 신이 내렸음을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이 당시 순창 주민들은 성황신을 대왕으로 칭했는데, 이는 곧 양의 성격을 지닌 대왕과 음의 성격을 지닌 대모산 부인을 합궁하는 주술적인 절차를 갖는 성황제를 행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지방관은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으로 추정된다. 그는 부임을 한 뒤 신격이 모호하고 무속적 성격이 강한 순창의 성황신과 제의를 ‘음사’로 규정한 다음 제의를 삭망제(朔望祭) 규모로 축소하였으며, 대모신에 대해서는 역시 4월 그믐날 제의를 지내게 하여 여러 날 치러 온 5월 단오 행사를 폐지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그 시기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성황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성황제, 또는 성황발고제라고 한다. 1566년(명종 21) 3월 12일에 간원(諫院)이 서낭발고제와 여제에 참석하지 않은 자의 파직을 청한 기사를 보면 성황발고제와 여제의 헌관은 한성부 당상으로 차송(差送)하는 것이 의주(儀註)에 기재되어 있어서 다른 관원은 차송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사에 3월 5일에 성황제를, 8일에 여제를 지냈다고 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봄과 가을에 지내는 제사 시점은 3월과 9월임을 알 수 있다.
사전 제도 정비 이후 모든 군현의 성황제는 『홍무예제』에 근거하여 유교식 절차를 밟았다. 예컨대 재배는 참신(參神)과 사신(辭神) 때 두 차례 한다. 『홍무예제』에는 신주를 쓰는 법이 있는데, ‘모주(某州) 모현(某縣) 경내(境內) 산천의 신’, 또는 ‘모주(某州) 모현(某縣) 성황의 신’ 등으로 쓴다고 하였다. 바람·구름·우레·비의 신을 한 패(牌)에 같이 쓰고, 산천의 두 신도 한 패(牌)에 같이 쓰는 데 비해 성황신만은 따로 한 신으로 여겨 폐백도 한 벌만 사용하였다.
위패를 배치하는 방법은 단 위의 북쪽 가에서 성황신은 서쪽에, 바람·구름·우레·비의 신은 가운데에, 산천의 신은 동쪽에 두고 모두 남향하여 한 줄로 자리를 잡는다. 행사 절차는 제일 먼저 바람·구름·우레·비의 자리에 나아가고, 그 다음에 산천의 자리에 나아가고, 그 다음에 성황의 자리에 나아간다.
성황신의 신위에는 생(牲)과 폐백과 제상을 한 벌만 올린다. 올리는 제수는 성황신위 앞이 가장 풍성하다. 천신에게 제사지낼 때는 축문과 폐백을 요대(燎臺)에서 불사르고 지기(地祇)에게 제사지낼 때와 사람 귀신에게 제향을 할 때는 축문과 폐백을 준비한 구덩이에 묻는 것이 원칙이나 대개는 관행적으로 모두 불살라 버린다.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의 『수당집』 8권에 황해도의 성황신에게 발고하는 다음과 같은 제문이 실려 있다.
"여귀(厲鬼)가 병마(病魔)를 몰고 와서 백성들이 병들어 쓰러지는구나. 마치 내 몸처럼 아프기에 이에 불양(祓禳)을 명하노라. 그대 위대하신 성황신은 저들 모든 백신(百神)들의 주인 아니신가. 그대 저 제사를 받지 못하는 모든 혼령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풀어 주고 억울함을 덜어 주시구려.[維厲作孼 民斯椓閼 予恫若己 爰命禳祓 有赫者隍 寔主百神 率彼無祀 暢鬱宣湮]"
[의의]
『성호사설』 「만물문(萬物門)」에는 성호 이익(李瀷)이 살던 경기도 안산의 소위 군자봉 성황신과 성황제에 대한 사실적인 기사가 실려 있다.
"내가 안산 고을에 살 때에 하루는 군수 아무개가 향좌수(鄕座首)를 보내서 ‘여제 날짜가 임박하기에 위패를 열어 본즉 절충장군이라고 씌어져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묻기에 다만 국전인 『오례의』에 의거해서 답을 했다. 절충(折衝)이란 칭호는 잘못된 것을 답습한 듯싶은데, 그 사람은 그 후에 과연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겠으나 이는 반드시 곡성이나 의성의 규례를 따라 잘못 사용하고 고치지 않은 것이리라. 비록 사람이 죽어서 토곡신에게 배향한다 할지라도 어찌 성황신 위패에다 바로 쓸 리가 있겠는가? 우리나라 풍속은 귀신 섬기기를 좋아하여 혹은 꽃장대에 종이로 만든 돈을 어지럽게 걸고 마을마다 무당이 돌아다니면서 성황신이라고 한다. 백성을 속이고 재물을 빼앗아 내는 계획을 하는데, 어리석은 백성은 이것이 두려워서 앞을 다투어 갖다 바친다. 그런데 관청에서는 금하지 않으니 참으로 괴이하다."
성호 이익의 글대로 성황신과 이를 모시는 성황제는 사림, 또는 사족들이 보기에는 유교적 이념에 맞지 않는 음사적 관행이었다. 그래서 조선중기 이후 많은 고을에서 퇴출되거나 변형되는 역사를 겪었다. 그러나 무속 현상이 으레 그러하듯 이러한 관행은 조선시대 내내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고을에서는 사라졌던 관행들이 부활하여 다시 시행된 경우도 있고, 강릉의 성황신처럼 한말에 와서 신격이 바뀌는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당시의 학자들조차 성황사보다는 서낭당이란 말에 익숙하고 성황신보다는 서낭신이 대중에게 더 익숙한 개념이 되었듯이, 고을 단위로 행해지던 성황신에 대한 제사는 마을 단위의 민속으로 주변화하고 민간화하는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