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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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소(城上所)

서지사항
항목명성상소(城上所)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대간(臺諫),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양사(兩司)
관련어감찰(監察), 경복궁(景福宮), 다시(茶時), 분대(分臺), 창덕궁(昌德宮)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대궐 문 위에 설치하여 사헌부·사간원의 하위 관원이 근무하던 곳, 또는 그곳에서 근무하던 관원.

[개설]
성상소는 언론을 담당하던 사헌부나 사간원 소속의 하위 관원이 근무하면서 공사(公事)를 출납하던 곳으로, 경복궁 정문 주위에 설치되었다. 성상소에서는 또한 사헌부 감찰(監察)의 다시(茶時)가 열리기도 하였다. 성상소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상소를 받아 왕에게 올렸으며, 궁궐에 출입하는 관원을 감시하고 그 내용을 보고하는 등 관원에 대한 일반적인 감찰 등의 일을 수행하였다. 조선전기에 성상소는 주로 공간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 대간의 언론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점차 대간이 궁궐에 나아가서 보고하는 행위까지도 성상소로 칭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연간에는 창덕궁 내에 별도로 성상소를 만들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성상소는 사헌부나 사간원의 하위 관원이 평상시 근무하기 위해 설치한 곳으로, 양사(兩司)에서 각 1명씩 근무하며 이곳을 통해 양사의 계사를 올렸다[『효종실록』 1년 3월 1일]. 성상소를 대궐 문 위에 설치한 것은 대간이 항상 성 위에 앉아 있게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영조실록』 20년 5월 28일].

조선전기에는 경복궁 정문의 우측에 위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에는 별도로 설치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원 전체가 모이는 좌기(坐起)를 제좌(齊坐)라 하는데, 제좌는 통상적으로 본청에서 행한다. 그리고 하위 관원들의 일상적인 근무나 사헌부 감찰이 모여서 차를 마시는 다시는 성상소에서 열렸다[『선조실록』 29년 9월 20일].

[조직 및 역할]
성상소에는 사헌부의 장령이나 지평, 사간원의 정언 등이 근무하였다. 대개는 하위 관원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였으며, 만약 근무자가 근무 중 일이 있으면 상위 관원으로 대체하였다. 1607년(선조 40) 성상소에서 근무하던 하위 지평인 윤효선이 병가로 성상소를 비우게 되자, 이를 상위 지평인 유성(柳惺)에게 대신 부탁하였다. 그런데 유성 역시 병으로 성상소에 나갈 수가 없게 되자 상위 직급인 장령 이구징(李龜徵)에게 이를 책임 지웠다[『선조실록』 40년 2월 28일]. 사헌부의 종3품직인 집의(執義)가 성상소 관원을 대행하기도 하였는데[『현종실록』 4년 3월 21일], 집의가 성상소를 대행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숙종실록』 24년 11월 1일].

성상소에는 이들 외에도 사헌부 소속의 감찰(監察)이 근무하였는데, 감찰은 평상시 성상소에 모여서 다시를 열고, 이곳에서 분대(分臺)를 정하였다. 분대란 감찰이 파견되어 각 관청과 창고 등을 검열하는 것을 말하는데, 감찰들의 분대는 성상소 관원의 지시를 받았다.

성상소 관원은 궁궐에 출입하는 관원을 감시하여 보고하였고[『중종실록』 3년 11월 11일], 일반 관원도 감찰이나 규찰 후 이를 보고하였다[『중종실록』 5년 2월 1일]. 또한 어사가 규찰한 내용에 따라 지방관을 처벌하는 문제 등에 대해서 본부인 사간원이나 사헌부와 함께 성상소의 이름으로 의견을 개진하였다[『중종실록』 17년 6월 8일]. 이런 역할은 성상소 관원이 속한 사헌부나 사간원의 고유 역할로, 성상소에서도 역시 대간의 고유 업무인 언론 활동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1519년(중종 14) 4월 19일 왕이 성상소에 있는 관원을 인견(引見)하자 성상소 관원은 공조 좌랑 이응이 경망하여 육조 낭관에 합당하지 않으니 체직해 달라고 청하였다[『중종실록』 14년 4월 19일]. 이때 대간에서 먼저 성상소를 통해서 의견을 개진하고 이어 양사가 논계(論啓)하였다[『중종실록』 16년 6월 4일]. 그런데 만약 성상소의 관원이 출사하지 않았는데도 대사헌이나 대사간 등이 논계할 일이 있으면 합계(合啓) 형식이 아니라 차자(箚子) 형식으로 보고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5년 2월 21일].

성상소의 언론 활동은 반드시 본부와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관행이었다[『중종실록』 20년 7월 14일]. 한편 양사의 장관인 대사헌이나 대사간이 출사하지 않았는데 논계할 일이 있으면, 성상소에서 일단 몇 단계의 논의 단계를 거쳤다. 논의를 위해 대간을 모으는 간통(簡通)을 하고, 그 결과 논의가 모아지면 성상소에서 초안을 작성해서 대사헌이나 대사간에게 보냈다. 그 뒤 논의를 거쳐 최종 확정하고, 성상소에서 확정된 안을 왕에게 보고하였다[『광해군일기』 6년 12월 14일]. 한편 이 과정에서 장관과 성상소 관원 사이에 이견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대상자는 왕에게 피혐계(避嫌啓)를 올렸다[『인조실록』 4년 5월 2일].

성상소는 대간 본연의 업무인 언론 활동 이외에도 각 사(司)를 적간(摘奸)하거나[『선조실록』 38년 7월 24일], 조강(朝講)에 참여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12년 윤12월 9일]. 사헌부나 사간원의 동정 보고도 성상소에서 맡았고[『명종실록』 18년 9월 4일], 새로 제수된 대간에 대한 자격을 심사하는 서경(署經)을 행하기도 하였다[『현종개수실록』 8년 11월 8일]. 또한 궁궐 밖에서 대신이 주관하여 전시(殿試)를 시행할 때는 성상소의 관원을 패초(牌招)하였는데, 이때 패(牌)에는 ‘성상소(城上所)’라는 세 글자를 써서 내보냈다.

[변천]
조선중기 이후 대간의 언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성상소의 개념이 확대된 듯하다. 예를 들어 1583년(선조 16) 6월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따르면 양사에서 계사를 초(草)하고 오직 한 사람이 대궐에 가서 왕에게 진달하는데 이를 성상소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무리 밤이 깊어 문이 닫혔더라도 그대로 성상(城上)에 있으면서 비답을 기다렸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있게 된 것으로 부연 설명하였다[『선조수정실록』 16년 6월 1일]. 즉 종전에 주로 공간 개념으로 사용되던 성상소라는 명칭이 이 시기에 이르면 대궐에 가서 왕에게 보고하는 행위 자체를 성상소라 칭하기도 한 것이다.

1624년(인조 2)에는 요즘 대간들이 군국(軍國)이나 형옥(刑獄) 등과 관련된 중요한 일을 전혀 듣지 못한다는 불만이 사간원에서 제기되었다. 이에 승정원 소속의 주서(注書)를 통해 조정에서 일어나는 중요 대소사를 성상소에 전달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2년 1월 11일].

1764년(영조 40)에는 성상소의 제도를 복구하였다. 대사간 남태저(南泰著)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경복궁에 성상소가 있을 때는 궁궐 앞에 육조(六曹)가 있어서 관서의 감독과 규찰이 가능하였지만, 당시는 양사의 본부를 성상소의 처소로 하는 등으로 인해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창덕궁 내에 별도로 입직하는 방을 만들어 성상소로 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40년 5월 13일].

[참고문헌]
■ 『성호사설(星湖僿說)』
■ 『홍재전서(弘齋全書)』
■ 『은대편고(銀臺便攷)』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집필자] 이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