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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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전(宣政殿)

서지사항
항목명선정전(宣政殿)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창덕궁(昌德宮), 편전(便殿)
동의어보평청(報平廳), 효문전(孝文殿), 효성전(孝成殿), 효원전(孝元殿), 효정전(孝定殿), 효휘전孝徽殿)
관련어광정전(光政殿), 빈전(殯殿), 영영문(迎英門), 혼전(魂殿)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7세기에는 빈전(殯殿), 19세기에는 혼전(魂殿)으로 사용된 창덕궁의 편전(便殿).

[개설]
선정전은 창덕궁의 공식적인 편전으로 1405년(태종 5) 창덕궁이 완공될 때 함께 지어졌다. 창덕궁이 조성된 초기에는 선정전을 보평청(報平廳)으로 불렀다[『태종실록』 5년 10월 19일]. 선정전의 주된 용도는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논하는 것이므로 이곳에서 상참(常參)을 하거나, 외교 사신을 만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신하들과 함께 경서를 읽고 논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조선전기에는 왕비가 선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푸는 일이 자주 있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왕실의 상례(喪禮)를 행하기 위해 빈전과 혼전이 설치된 사례가 자주 나타난다.

현재 창덕궁에 남아 있으며, 전각의 정면에 천랑이라 불리는 회랑이 조성되어 있어 다른 전각과 차별되며, 청기와를 이용한 지붕이 특징이다. 궁궐 건물 중 창덕궁의 명정전(明政殿)과 홍화문(弘化門)이 광해군 연간에 조성된 것으로 가장 오래되었으며, 선정전은 1633년(인조 11)에 재건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17세기 건물의 특성을 보인다.

[위치 및 용도]
선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 동쪽에 행각을 맞대고 연접해 있다. 인정전에서 의례가 있을 때 왕은 선정전에서 머물렀다가 의례의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보고 받으면 선정전에서 나와 서쪽에 위치한 인화문(仁和門)을 통해 인정전으로 들어섰다.

선정전은 왕이 매일 신하들과 만나 정사를 보고 받는 상참과 외교 사신의 접대를 비롯하여 공개적으로 경서를 읽고 논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왕이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곳으로 주로 사용되었으나, 그 외에 빈전과 혼전 등의 왕실 상장례 공간으로 사용된 사례도 자주 있었다. 또 조선전기에는 왕비가 양로연을 열거나 하례를 받는 장소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용 성향은 시기적으로 차이점이 나타난다.

조선전기에 왕비가 선정전을 사용하는 사례가 정기적으로 나타난다. 주로 해마다 8월에서 9월 사이에 양로연을 개최하였으며, 친잠을 행한 후 하례를 받거나, 책보를 받는 의례 등이 이루어졌다. 왕비가 궁궐의 편전에서 양로연을 베풀기 시작한 것은 1433년(세종 15) 사정전(思政殿)에서 시작되었다. 사정전은 경복궁의 편전이다. 1432년 8월에 왕비의 양로연 의주를 정하고, 1433년 윤8월 3일에 왕이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3일 후 윤8월 6일에 왕비가 사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1434년(세종 16)과 1435년(세종 17)에도 왕이 궁궐의 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면 가까운 날 왕비는 편전에서 부녀자들에게 양로연을 베풀었다. 세종 연간에 양로연의 풍습은 그 의도가 아름답다 하여 영구히 시행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양로연은 1433년부터 1435년까지 이루어졌으나 가뭄으로 잠시 쉬었다가 1440년(세종 22)부터 1442년(세종 24)까지 양로연을 8월과 9월 사이에 베풀었다. 또 세종 연간에는 왕과 중궁이 함께 참여하여 선정전에서 공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중궁이 선정전에서 공신들의 아내를 불러 모아 잔치를 열었다.

1471년(성종 2) 9월 12일이 되어 왕이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고[『성종실록』 2년 9월 12일] 이틀 후 14일에 왕비가 선정전에서 양로연을 행했다. 이날 선정전에서 왕비가 첫 양로연을 행했으며, 이후 중종 연간까지 선정전에서 중궁의 양로연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성종 연간에는 왕비가 양로연을 베푸는 것 외에 12월 말에 나례를 관람하였다. 1477년(성종 8)에는 왕비가 친잠을 행한 후 명부로부터 하례 받는 의식이 이루어졌다. 이때 백관은 영영문(迎英門) 밖에서 하례를 올렸다.

문정왕후(文定王后)는 1553년(명종 8) 7월에 선정전에 나가 수렴청정을 거둘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명종실록』 8년 7월 12일].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왕비가 선정전을 사용하는 사례가 사라진다. 대신 빈전과 혼전 등의 왕실의 상례(喪禮)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창덕궁의 선정전을 인종의 혼전으로 정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7월 18일]. 인종의 혼전을 정할 때 저승전(儲承殿)은 봉심하기 좁아서 사용하기 어렵고, 사정전으로 하자니 3년 동안 정사를 볼 장소가 없다 하여 이궁으로 사용되던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을 혼전으로 선정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 인조, 1659년(현종 즉위) 효종, 1675년(숙종 1) 현종, 1683년(숙종 9) 명성왕후, 1724년(영조 즉위) 경종의 빈전 의례가 이곳에서 설행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에 정조의 혼전이 설행된 이후 왕이 승하하면 혼전 의례가 이곳에서 설행되기 시작하였다. 1800년 정조의 혼전 효원전(孝元殿), 1834년(헌종 즉위) 순조의 혼전 효성전(孝成殿), 1849년(철종 즉위) 헌종의 혼전 효정전(孝定殿), 1863년(고종 즉위) 철종의 혼전 효문전(孝文殿)이 선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및 현황]
선정전은 1405년(태종 5)에 창덕궁이 조성되면서 보평청(報平廳)으로 건립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창덕궁의 대부분의 전각이 불탔으며 이것을 1609년(광해군 1)에 중건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인정전과 수정당(修政堂)만 남고 대부분 소실되어 1633년(인조 11)에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하여 그 자재를 이용한 복구공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선정전은 인경궁의 광정전(光政殿) 9칸을 철거하여 그 자재로 재건하였다. 인경궁의 광정전은 인경궁의 편전 건물이었으며 청기와를 덮었다. 이를 옮겨 지었기 때문에 선정전의 지붕은 청기와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선정전은 인조 연간에 중건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창덕궁에 남아 있다.

[형태]
선정전의 규모는 정면 3칸에 측면 3칸으로 총 9칸 규모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청기와를 이어 다른 전각과 달리 지붕이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청기와를 궁궐 전각에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편전인 사정전에는 청기와를 이용하여 지붕을 덮었다. 성종 연간에는 봉선사(奉先寺)에 청기와로 지붕 공사를 했으며, 이외에도 원각사(圓覺寺)·장의사(藏義寺) 등이 청기와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기와를 굽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매우 컸기 때문에 기와에 청기와를 사용하는 것은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다. 광해군은 인경궁을 건립하면서 정전인 홍정전(弘政殿)과 편전인 광정전에 청기와를 구워 지붕을 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 청기와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인경궁의 광정전이 이건되어 남겨진 선정전만이 그 유래를 보여 준다.



선정전의 정면 어간에서부터 선정문까지 이어지는 회랑은 앞마당을 동서로 이분하고 있다. 이 회랑의 용도는 빈전과 혼전 의례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에서는 이곳을 정자각이라 부르기도 한다. 혼전에 올리는 제물을 진설하거나 향을 올릴 때 향이 진입하는 동선이 되기도 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선정전은 17세기에 왕의 빈전 의례가 설행된 공간이었다. 왕이 승하하고 나면 5일째에 빈전을 차리고 6일째에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사위 의례가 행해진다. 사위 의례의 주된 절차는 왕위를 계승할 왕세자가 빈전에서 대보(大寶)유교(遺敎)를 받고 여차(轝車)에서 잠시 쉬었다가 궁궐의 정전에 들어서 문에서 어좌에 오른 후 정전에서 하례를 받는 과정이다. 조선후기에는 창덕궁을 법궁으로 사용했으므로, 사위 의례가 행해지는 장소는 창덕궁의 인정문이었다.

17세기에 인조와 효종·현종의 빈전은 모두 선정전에서 설행되었으며, 왕위 계승 의식은 모두 인정문에서 이루어졌다. 그 절차는 『조선왕조실록』「왕세자즉위교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선 빈전이 마련된 창덕궁의 선정전 동쪽 뜰에 나아가 빈전을 향해 사배례를 행하고 섬돌에 올라가 향안 앞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운다. 대보와 유교를 받고 빈전 앞에 마련된 여차로 돌아간다. 잠시 후 여차에서 나와 소여(小輿)를 타고 연영문(延英門)과 숙장문(肅章門)을 거쳐 인정문(仁政門)에 설치된 어좌에 오른다. 왕세자가 어좌에 오르면 백관이 사배하고 산호(山呼)를 외치며 하례를 올린다. 이러한 의례를 마치면 왕세자는 인정문에서 인정전에 올라가 인화문을 통해 빈전 앞에 마련된 여차로 돌아간다. 의식을 마치고 나면 인정문에서 교서를 반포한다. 현종과 숙종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며, 어좌에서 여차로 돌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울어 그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 [집필자] 신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