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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선릉은 성종의 능과 정현왕후의 능 두 개의 능역으로 이루어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성종은 25년의 재위 기간 동안 세조대부터 편찬해 오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여 반포하는 등 정치 기반을 안정화하는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1494년(성종 25) 38세의 나이에 승하하여 선릉에 안장되었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는 1473년(성종 4) 6월에 12세의 나이에 숙의(淑儀)로 봉해졌으며,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되고 이듬해인 1479년(성종 10) 11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1530년(중종 25) 8월에 경복궁에서 승하하여 성종의 능 왼쪽 산등성에 예장되었는데, 성종의 능을 구(舊) 선릉이라 하고, 정현왕후의 능을 새[新] 선릉이라 불렀다[『중종실록』 25년 8월 28일].
선릉은 1592년(선조 25) 왜적이 침입하여 능을 파헤친 사건으로 인해 1593년(선조 26)에 새로 개장되어 오늘에 이른다.
[조성 경위]
성종은 1457년(세조 3) 7월 30일, 세조의 맏아들이자 후에 덕종(德宗)으로 추존되는 의경세자(懿敬世子)와 역시 나중에 소혜왕후(昭惠王后)로 추존되는 세자빈 한씨(韓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요절함에 따라 세조의 보살핌을 받으며 궁중에서 자랐는데, 당시 왕이었던 예종이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1469년(성종 즉위) 11월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고, 이듬해인 1495년(연산군 1) 4월 6일 광주부 서면 학당리 언덕에 임방(壬方)을 등지고 병방(丙方)을 향한 방향, 즉 서북쪽을 등지고 동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에 안장되었다[『연산군일기』 1년 4월 6일].
정현왕후는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훗날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晉城大君)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았다. 1530년(중종 25) 8월 22일 경복궁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며, 그해 10월 29일 성종의 능 왼쪽 언덕에 축방(丑方)을 등지고 미방(未方)을 바라보는 방향, 즉 북북동을 등지고 남남서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묻혔다.
[조성 상황]
성종의 능지를 정할 때, 간심사(看審事) 윤필상(尹弼商) 등은 광평대군(廣平大君)의 묏자리를 최고의 길지로 낙점하였다. 하지만 연산군과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광평대군의 자손이 병들거나 일찍 죽어 광평대군의 묏자리를 불길하게 보았다. 또한 능지 주변에는 종척(宗戚)과 재신(宰臣)의 무덤이 많아 예장(禮葬)을 해 주어야 하니 그 폐단이 생길 것이 염려스럽고, 주변의 민가도 헐어 내야 하니 이는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일이라 여겼다. 평소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 성종이 그러한 곳에 묻힌다면 혼령마저 편치 못하시리라 여겨 다른 능지를 찾을 것을 주장하였다. 더구나 그곳을 능지로 정할 경우 도성에서 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공역의 관리나 왕의 행차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윤필상 등이 묘의 좌향만 바꾸면 더 없이 좋은 길지임을 주장하자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연산군일기』 1년 1월 10일][『연산군일기』 1년 1월 11일]. 결국 광평대군의 묘를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 대모산 기슭으로 이장하고, 그 자리에 선릉을 조성하였다.
선릉은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석실은 만들지 않았고 사대석만 세웠다. 능역에는 정자각 및 수복방, 수라간 등을 세웠으며, 능지 남쪽에는 연못을 만들었다. 1936년에 편찬된 『선정릉지(宣靖陵誌)』에는 이와 같은 능역의 배치와 재실 영역의 향대청, 전사청의 배치가 기록되어 있으나, 재실 영역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다.
[변천]
1592년(선조 25) 12월 왜적에 의해 선릉의 두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변이 일어나, 1593년 7월 27일에 선릉을 개장하고 석물을 개수하였다. 이때 능에 「개장지문(改葬誌文)」을 묻었다.
선릉에는 화재가 잦았는데, 1625년(인조 3) 11월에는 선릉의 정자각 정문에 불이 나서 한쪽 문이 다 타 버렸다. 또 다음 해 2월에는 성종의 능에 화재가 있었으며, 같은 달에 정현왕후의 능에도 불이 났다[『인조실록』 4년 2월 15일].
1771년(영조 47) 1월 29일에는 선릉과 정릉(靖陵) 사이의 고개에 길이 나고 흙이 파여 벽돌로 정비하였고, 1824년(순조 24)에는 정자각을 개수하였다.
『선정릉지』에는 능역의 상설도를 포함하여 정자각 주변의 건물 배치와 선릉의 재실 권역에 배치된 향대청, 전사청의 구성 평면이 실려 있어 오늘날의 배치와 비교해 볼 수 있다. 능역이나 정자각 주변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재실 영역은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재실은 원래 두 능역에 각각 배치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으로 추측되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시기는 알 수 없다. 복원된 재실은 선릉과 정릉 사이에 배치되어 공통 재실로 운영되고 있으며, 2005년에 이 재실과 행랑의 해체 보수 공사가 있었다.
[관련 사항]
연산군은 성종의 묘지문[誌文]을 보고 생모인 윤씨의 폐비 사건을 알게 되었고[『연산군일기』 1년 3월 16일], 그 일을 계기로 이후 폭정을 일삼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