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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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감(繕工監)

서지사항
항목명선공감(繕工監)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공조(工曹)
하위어분선공감(分繕工監), 자문감(紫門監), 탄색(炭色), 삭색(索色), 공작색(工作色), 철물색(鐵物色), 환하색(還下色), 죽색(竹色), 재목색(材木色), 장목색(長木色), 압도색(鴨島色)
관련어장작감(將作監), 선공사(繕工司), 선공시(繕工寺)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고려~조선시대 토목(土木)과 영선(營繕)을 담당하던 관서.

[개설]
선공감은 고려시대 이래 토목과 영선 등의 건축을 맡아본 관청으로, 조선시대에는 궁궐조성도감 폐지 이후 주요 건축물의 조성과 관곽(棺槨)의 제작, 왕실 및 중앙에 필요한 땔감 연료인 시탄(柴炭) 등을 조달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수레를 제작하여 역(驛)의 잡물을 수송하는 일도 관할하였다. 선공감의 부속 관아(官衙)로는 서부 인달방에 두었던 분선공감(分繕工監)과, 궐내의 영선을 맡아보기 위하여 국초에 창덕궁 서쪽 금호문 밖에 두었던 자문감(紫門監)이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에는 토목과 영선에 관한 일을 맡기기 위해 목종 때 장작감(將作監)을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감(監)·소감(少監)·승(丞)·주부(注簿) 등이 있었는데, 문종 때 관제를 고쳐 종3품 판사(判事) 1명, 정4품 감 1명, 종4품 소감 1명, 종6품 승 2명, 종7품 주부 2명을 두었다. 1298년(고려 충렬왕 24)에 선공감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판사를 없애고 감을 종3품으로 올렸다. 1308년(고려 충선왕 즉위)에는 선공사(繕工司)로 개칭하고, 종2품 영사(領事) 1명, 정3품 영(令) 3명, 정4품 부령(副令) 3명, 정5품 승 2명, 정7품 주부 2명을 두었다가 뒤에 다시 선공시(繕工寺)로 고쳤다. 이후 1356년(고려 공민왕 5)에는 장작감, 1362년에는 선공시, 1369년에는 다시 장작감, 1372년에는 다시 선공시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392년(태조 1) 7월에 관제를 제정할 때 선공감을 설치하고 토목과 영선 및 시탄(柴炭) 공급 등을 관할하게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 건국 초인 1392년(태조 1)에는 정3품 판사 2명, 종3품 감 2명, 종4품 소감 2명, 종5품 승 1명, 종5품 겸승(兼丞) 1명, 종6품 주부 2명, 종6품 겸주부(兼主簿) 1명, 종7품 직장(直長) 2명, 정8품 녹사(錄事) 2명을 두었다. 1405년(태종 5) 공조(工曹)의 속아문으로 편제되었고, 1414년(태종 14)에는 감을 정(正)으로, 소감을 부정(副正)으로, 승을 판관(判官)으로 개정하였으며, 1460년(세조 6) 5월에는 부정 1명과 직장 1명을 감원하였다. 그 뒤 1466년(세조 12) 1월에는 관제를 크게 개정하여 판사를 정으로, 정을 부정으로, 부정을 첨정(僉正)으로, 부녹사를 부봉사(副奉事)로 개칭하였다.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면 제조(提調) 2명, 정3품 정 1명, 종3품 부정 1명, 종4품 첨정 1명, 종5품 판관 1명, 종6품 주부 1명, 종7품 직장 1명, 종8품 봉사(奉事) 1명, 정9품 부봉사 1명, 종9품 참봉 1명으로 직제가 결정되었다. 『속대전(續大典)』 단계에서 정 1명, 첨정 1명, 판관 1명, 직장 1명, 참봉 1명 등이 혁파되었고, 봉사 1명이 증원되었으며 종9품의 감역관(監役官)과 가감역관(假監役官)이 각각 3명씩 새롭게 설치되었다.

주부가 관할하는 부서에는 탄색(炭色)·삭색(索色)·공작색(工作色)이 있었고, 봉사가 관할하는 부서로는 철물색(鐵物色)·환하색(還下色)·죽색(竹色)·재목색(材木色)·장목색(長木色)·압도색(鴨島色) 등이 있어 토목과 영선 및 시탄 조달 업무를 담당하고, 심지어는 수레를 제작하여 역의 잡물을 운송하는 일도 맡아보았다.

[변천]
토목과 영선 등에 관한 업무는 삼국시대 신라의 공장부(工匠府)에서 맡아본 것이 그 시초였다. 궁예(弓裔)가 세운 태봉(泰封)에서는 남상단(南廂壇)을 두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목종이 장작감을 둔 데서 비롯되었다. 그 뒤 충렬왕이 선공감으로 이름을 고치고 판사를 없앴으나, 충선왕 때 다시 선공사(繕工司)로 개칭하고, 소부(小府)·궁궐도감(宮闕都監)·창고도감(倉庫都監)·연등도감(燃燈都監)·국신(國贐)을 합하여 영사(領事) 1명을 두고, 감을 영(令)으로 고쳐서 3명으로 증원하였다. 또 소감을 부령으로 고쳐서 3명으로 늘리고 영사에서 주부까지는 모두 겸관(兼官)으로 하였는데, 뒤에 다시 선공시로 이름을 바꾸었다.

공민왕대 이후 몇 차례 변동을 거듭하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1392년(태조 1) 7월에 관제를 새로 정할 때 선공감을 설치함으로써 토목·영선·시탄 등을 맡은 중심 기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경국대전』 단계에서는 정3품 아문으로 규정되었다가, 『속대전』 단계에서 종3품으로 위상이 낮아졌다. 1894년(고종 31) 관제 개정 시에 전각사(殿閣司)에 병합되면서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관직명사전(官職名辭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호상·하향주, 「한국의 중세·근세 목탄관련 자료검토」, 『경주사학』24·25, 2006.
■ 민덕식, 「조선 숙종대의 도성 수축공사에 관한 고찰 - 성곽사적 측면을 중심으로」, 『백산학보』44, 1994.
■ 신영훈, 「태종조 감역관 박자청고」, 『향토서울』48, 1989.

■ [집필자] 조병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