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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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총대(瑞葱臺)

서지사항
항목명서총대(瑞葱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창덕궁(昌德宮)
관련어군사훈련(軍士訓鍊), 녹음대(綠陰臺), 동궐(東闕), 무과(武科), 열고관(閱古觀), 춘당대(春塘臺)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연산군대에 놀이를 하기 위한 장소로 세웠다는 창덕궁 후원의 거대한 석대.

[개설]
창덕궁의 후원은 조선초기에는 대부분 공터여서 활쏘기, 포 쏘기 같은 군사 훈련을 하거나 사냥을 즐기고 잔치를 하던 장소로 쓰였다. 궁중 잔치와 새로운 놀이를 탐닉했던 연산군은 1505년(연산군 11) 전교를 내려 서총대 건설을 명했다[『연산군일기』 11년 6월 26일]. 공터로 남아 있던 궁궐의 후원 자리에 높이가 열 길이나 되고 1,000명이 한꺼번에 앉아 놀 만한 공간을 건설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후원의 너른 공터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용을 아로새긴 돌난간으로 꾸민 서총대가 완성되었다.


또한 그 앞에는 깊이가 열 길이나 되고 큰 배를 띄워 타고 놀 만한 크기의 연못을 파도록 하였다. 당시 연산군은 서총대와 인양전(仁陽殿)에서 쓸 채화석(彩花席) 2,000장을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미리 준비해 놓으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를 통해 서총대가 1,000명이 앉아 놀 만한 자리라는 것이 상징적 의미의 크기가 아닌 실제 조성될 공간의 크기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위치 및 용도]
서총대의 명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연산군 때 창덕궁의 후원에는 이미 녹음대, 춘당대라는 ‘대(臺)’가 있어 군사 훈련, 소요(逍遙), 잔치를 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중종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연산군이 행했던 대부분의 건설 행위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서총대 역시 그러한 까닭에 자취가 남아 있지 않지만 성종 때부터 상서롭게 여긴 장소였기 때문에 서총대라는 이름을 잃지는 않았다고 판단된다.

정조는 자신의 문집에 지금의 열고관(閱古觀) 앞에서 집춘문(集春門)까지는 모두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원래 빈터였지만 활쏘기를 시험하던 곳이고, 열고관이 바로 서총대의 옛터라고 기술하였다. 또한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시에 “총대사날석거서(蔥臺射埒石渠西”라고 하여, 석거각의 서쪽에 있는 서총대는 활터였다고 말하고 있다. 석거각은 규장각(奎章閣)을 다르게 이름 한 것이고, 열고관은 「동궐도(東闕圖)」에서 보이는 규장각 남서쪽에 책을 보관하던 ‘ㄱ’자형 2층 집을 말한다. 서총대 앞에 배를 띄워 놀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연못을 팠다고 하였는데 이는 부용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변천 및 현황]
1505년(연산군 11)에 석대가 완성되었으나 그다음 해에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석대를 철거하였다[『중종실록』 2년 윤1월 5일]. 철거한 돌로 연산군 때 훼손된 문묘·성균관을 다시 수축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성종 때, 후원 서총대가 있던 장소에서 뿌리 하나에 줄기 아홉인 파가 올라왔다. 이를 상서롭게 여겨 돌을 쌓아 올리고 그 파를 재배하였다. 때문에 이곳의 이름을 ‘상서로운 파’라는 뜻의 ‘서총대(瑞葱臺)’라 하였다. 연산군대 서총대를 짓는 일은 매우 큰 공사라 백성들의 고생이 심했다. 강제 동원하는 것은 물론 베를 공출하여 자금으로 썼다. 심한 징수로 인해 백성들이 입던 옷의 솜을 꺼내어 베를 짤 정도였다. 때문에 베의 색과 품질이 좋지 않자, 나쁜 질의 베를 일컬어 ‘서총대포’라 불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계갑일록(癸甲日錄)』
■ 『궁궐지(宮闕志)』
■ 『기묘록(己卯錄)』
■ 『다산집(茶山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역대요람(歷代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
■ 박정혜,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 [집필자] 조옥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