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에 정기·부정기적으로 파송되던 사행에는 양국의 협약에 따라 규정된 인원을 보냈는데, 서장관(書狀官)은 정사·부사와 함께 3사(使)라 하여 사행의 중요 구성원 중의 한 명이었다.
서장관은 사행 전반에 걸쳐 외교문서의 관장, 물화의 점검, 서책 무역, 정보 탐지, 견문록의 작성·보고 등 사행 외교의 실무자 역할을 하였다. 서장관은 기록관이라고도 하며 행대어사(行臺御使)를 겸하였다.
[담당 직무]
서장관은 대체로 사헌부의 감찰이 임명되었다. 정5품의 문관에서 차임되었는데 정4품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다만 대일본 사행에서는 정6품에서 차임하여 정5품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서장관의 주요 임무는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헌부의 서리(書吏) 한 사람을 대동하여 사절이 왕래할 때 물화(物貨)를 점검하고 사무역 행위를 규제하여 사절 일행을 감독하고 통솔하였다. 한편으로는 직접 서적 무역의 임무도 수행하였으며, 정·부사가 함께 가지 않는 단사(單使) 사행일 경우 서장관이 부사의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특히 사절이 출발한 후부터 돌아올 때까지 그 사이에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실을 기록하여 귀환 후에 왕에게 보고하고, 그 기록을 승문원에 제출해야 하는 임무도 맡았다.
[변천]
세종대 중반까지 모든 사행에 반드시 서장관이 차정되지는 않았다[『세종실록』 14년 10월 11일]. 서장관의 차임이 없을 때에는 사헌부의 감찰 한 사람을 종사관에게 구전(口傳)하여 들여보내어 이를 대신케 하였다. 특히 성종대부터 질정관(質正官)이 사행원에 차임되는 사행에서는 서장관이 차임되지 않고 질정관이 서장관의 직임을 겸대하였는데, 이때에는 질정관으로 피선(被選)된 사람 중에 그 직질에 따라 장령 이하의 벼슬을 겸대하여 보냈다[『중종실록』 8년 5월 27일]. 때로는, 행대감찰(行臺監察)을 의주로 보내거나, 신안참로(新安站路)의 찰방(察訪)을 의주로 보내고, 또한 별감(別監)을 보내어 사행을 감찰하게 하여 찰방이나 별감이 서장관의 직임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서장관이 차정된 경우에는 정4품에서 정6품의 문관 중 사헌부의 감찰로서 임명하였지만, 중요 사절일 경우에는 반드시 품계가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사헌부 감찰이 아니어도 서장관으로 차정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즉위년 12월 3일].
이처럼 서장관은 사절의 경중에 따라, 또는 시기에 따라 사행에 차임되기도 하고 차임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사행의 구체적 규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의의]
조선시대 외교관계에서 사절(使節)의 주요 임무는 예물 수수와 문서 전달이었다. 이 중 문서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서장관이 하였다. 또한 서장관은 귀환 후에 사행에서의 견문한 사건 등을 왕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가졌다. 따라서 서장관은 사절단 일행의 감찰뿐 아니라 당시 외국 정황을 보고하는 첨병(尖兵)의 역할을 하여 조선 정부의 외교정책 수립에 기여하였다 하겠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통문관지(通文館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송희, 「조선초기 대명외교에 대한 연구 -대명사신과 명 사신 영접관의 성격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55·56, 1998. 10.
■ 박성주, 「조선초기 遣明 使節에 대한 一考察」, 『경주사학』 19, 경주사학회, 200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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