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서경은 대간(臺諫)이 관직 임명이나 법의 제정과 관련하여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로서, 고신서경(告身署經)과 의첩서경(依牒署經)으로 구분되었다. 고신서경의 경우 고려에서는 관료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졌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일부 예외 조항을 제외하고 4품 이상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조선중기 이래 언론이 활성화되는 과정에서 대간이 서경 대상자에 대한 처리를 엄격하게 시행하면서 왕과 갈등을 일으키는 사례가 늘었다.
[내용 및 특징]
서경은 관리 임용 시 관직을 받는 자의 임명장에 해당하는 고신(告身)에 서명하는 고신서경과 입법(立法)·개법(改法)·기복(起復) 등의 사안에 서명하는 의첩서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기복은 상중(喪中)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국가의 필요에 의하여 상제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을 말하였다.
고신서경의 경우 대간에서는 관직을 제수받은 당사자 및 부변(父邊)과 모변(母邊)의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외할아버지 4조(四祖)를 조사하여 혈통과 범죄 사실의 유무를 판별하였다. 이 과정에서 별다른 허물이 없으면 서경을 해 주었지만,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작불납(作不納)·정조외(政曹外)·한품자(限品者) 등의 표기를 달았다. 작불납은 문제가 있어 서명을 하지 않는 경우이고, 정조외는 청요직(淸要職)에 제수되지 못하게 하는 경우이며, 한품자는 일정 관품 이상으로 승진할 수 없도록 한 경우였다.
고신서경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모든 관원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어서 5품 이하의 관원에게만 서경을 거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 1품부터 9품의 관료 전체를 대상으로 하였던 것에 비하여 일정한 제한을 두었던 것인데, 서경 대상과 관련한 여러 차례에 걸친 논의 끝에 4품 이상을 제외하는 성종대의 결정이 『경국대전』에 수록된 뒤에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경국대전』 「고신(告身)」 조항에 수록되어 있는 서경에 대한 규정은 의정부·이조(吏曹)·병조(兵曹)·사헌부·사간원·장예원·홍문관·춘추관·지제교·종부시·세자시강원 등의 관료와 각 도의 도사와 수령, 그리고 선전관과 부장 등을 대상으로 정하고 있으며, 50일이 지나도록 서경하지 않는 경우에는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한편 『대전회통』에서는 『경국대전』의 조항을 기본 바탕으로 하면서도 약간의 변화가 보이는데, 각 도의 도사와 수령으로서 처음으로 임명되는 자는 비록 4품 이상이라도 모두 서경을 거치도록 하였으며, 감찰과 도사·수령 역시 4품 이상이라도 서경을 받도록 하였다. 부모의 4조 외에도 처(妻)의 4조까지 살펴보도록 하여 조사 대상을 확대하였다. 서경을 할 때에 양사(兩司)에서 3명의 관원을 갖추도록 했는데, 3명을 갖추지 못하면 2명에 그치더라도 왕에게 보고하여 시행하되, 이 경우에는 양사가 함께 모인 후 서경하도록 하였다. 또한 양사가 함께 회동하지 못하더라도 사간원과 사헌부 어느 한 쪽의 관원이 갖추어지면 서경을 먼저 하도록 하였다. 감찰의 경우 사헌부에서 먼저 서경을 하여 허용된 후라야 양사에서 서경하도록 했는데, 이는 사헌부 내의 자체 검열을 존중해 주는 처사였다. 세 차례에 걸쳐 서경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은 체직시키도록 하였으며, 시호(諡號)의 경우에는 왕의 결정이 있은 후에 양사에서 서경하도록 하였다.
『경국대전』과 『대전회통』에 수록되어 있는 이 같은 규정들은 여러 시대에 걸친 논의들이 종합된 결과였다. 서경 대상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고 『조선왕조실록』에서 나타나는 서경 관련 논란들을 살펴보면, 성종대에 이르러 승려들에 대해서도 대간에서 서경을 맡아 보았던 관행이 폐지되었으며[『성종실록』 9년 8월 4일], 아내의 4조까지 서경에 포함시키자는 주장도 이 시기에 제기되기 시작하여[『성종실록』 16년 1월 28일], 논쟁 끝에 『경국대전』 시행 후 1491년(성종 22)까지의 현행 법령을 정리한 『대전속록』에 수록되었다.
중종대에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거나 옛 법을 고칠 때 의정부와 각각 그 해당 조(曹)의 당상이 회의하여 확정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입법과 관련한 대간의 서경권이 축소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8년 11월 30일][『중종실록』 37년 3월 26일]. 그러나 대간은 여전히 큰 권한을 행사하여 시호를 제정할 때 대간에서 서경을 하였으며[『중종실록』 23년 7월 8일], 만약 시호 제정에 불만이 있는 경우 대간에서 서경 기한을 고의로 지나게 하여 시호를 개정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 23년 7월 11일].
대체로 성종부터 중종대를 거치면서 고신서경의 경우 관직을 받는 자의 가계와 혈통 문제뿐만 아니라, 평소의 인망과 같은 품행이 문제 되는 경우가 잦았다[『성종실록』 21년 10월 26일]. 특히 청요직 계통의 서경에서는 관직을 받는 자에 대한 물의(物議)와 청망(淸望)이 중시되었다. 여기서 물의란 물론(物論)과 같은 개념으로 사람들의 논의나 비평을 의미하였다. 중종대에 들어와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져 물론(物論)에 의거하여 의견이 분분한 경우 서경을 거부하는 사례가 많아졌으며[『중종실록』 15년 7월 17일], 또 불만스러운 인사에 대해서는 대간에서 으레 서경을 지연하여 체직시켰다[『중종실록』19년 6월 10일].
『대전회통』 규정 가운데 서경 인원에 대한 기준을 완화시키는 경향이나 시호를 서경할 때 왕의 허락을 얻도록 하는 규정들은 대간이 서경을 통하여 왕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것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마련된 조처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대간과 언론의 역기능에 대한 문제점들이 지적되는 가운데, 서경과 관련해서도 비판이 일었다. 유수원은 『우서(迂書)』에서 언론의 문제점에 대하여 폭넓게 지적하였는데, 서경의 경우에는 경력이 기준에 차지 못하였는지, 그릇된 방식으로 승진을 하고 있는지, 탐욕과 간사한 행적이 미처 발견되지 못하였는지 등의 사실에 입각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한갓 물의(物議)와 문벌(門閥)로 사람을 쓰게 되면서 대간의 서경이 임용을 위한 의례적인 도구로 전락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유수원은 서경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그 대안으로 관제(官制)를 자세하게 하고 관리의 임명에 신중을 기하도록 할 것을 주문하였다.
[변천]
고신서경의 대상을 한정하는 것과 관련한 변화들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에는 그 범위가 1품부터 9품에 이르기까지 전 관료를 대상으로 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들어와서는 태조가 인재를 등용하는 데 대간의 서경을 일일이 받는 것이 불편하다고 표현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태조실록』 1년 12월 22일]. 결국 태조는 고신식(告身式)을 개정하여 1품부터 4품까지는 왕지(王旨)를 내려 관교(官敎)라 하고, 5품부터 9품까지는 문하부에서 왕명을 받아 직첩을 발급하여 교첩(敎牒)이라 하였다[『태조실록』 1년 10월 25일]. 이에 따라 대간의 서경은 4품 이상에는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정종대에는 대간에서 관교법을 폐지하여 1품 이하 고신도 대간이 모두 서경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도평의사사의 논의 끝에 이를 수락하였다[『정종실록』 2년 1월 24일]. 하지만 태종대에 들어와 고신법을 다시 개정하여 3품 이상에는 관교법을, 4품 이하는 대간이 서경하도록 했다[『태종실록』 12년 1월 29일]. 그러나 대간의 거듭된 건의로 다시 1품부터 9품에 이르는 모든 관원의 고신을 대간이 서경하도록 허락하였다[『태종실록』 13년 4월 16일]. 그러다 이천우를 이조 판서에 임명하려는 과정에서 태종과 대간이 대립하여 4품 이상은 다시 관교법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명하였다[『태종실록』 13년 10월 22일].
이러한 양상은 세종대에도 계속되었다. 세종은 대간의 서경 범위를 확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1426년(세종 8)에 허락해 주었다[『세종실록』 8년 1월 26일]. 하지만 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4품 이하로 제한하도록 개정하였다[『세종실록』 8년 9월 4일].
세조대에는 대간의 서경권이 이전보다도 축소되었는데, 군사고신(軍士告身)의 경우 대간의 서경을 거치지 않고도 발급하여 녹을 받게 하였다[『세조실록』 12년 7월 9일]. 이로 인하여 서경 자체가 폐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성종 즉위 직후 군사고신을 제외하고 조사(朝士)의 고신에 있어서는 서경을 재개하도록 하여 서경이 회복되었다[『성종실록』 1년 3월 4일]. 그리고 이것이 『경국대전』 「고신(告身)」 조항에 수록되어, 이후 서경의 운영과 관련한 세부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5품 이하를 서경하는 것에 있어서는 커다란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