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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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生員)

서지사항
항목명생원(生員)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성균생원(成均生員), 신방생원(新榜生員)
관련어사마시(司馬試), 생원시(生員試), 소과(小科), 진사(進士), 진사시(進士試)
분야사회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하나인 생원시 합격자에게 주어진 칭호.

[개설]
생원(生員)은 조선시대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사람을 부르던 호칭이다. 조선시대 500여 년간 실시된 총 230회의 생원시에서 24,220여 명의 생원이 배출된 것으로 추산된다. 생원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생원이 된다는 것은 사족으로서 갖추어야 할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음을 국가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다. 생원 칭호만으로도 사회적으로 명예와 지위를 누리며 양반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담당 직무]
생원에게 부여된 기본 임무는 성균관에서 독서하는 것이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원점(圓點) 300점을 얻으면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태종실록』 17년 윤5월 14일]. 기본 방침은 그렇지만 원점을 채우지 못하거나 성균관에서 수학하지 않아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시의 합격 정원은 각 100명이지만 문과는 33명이며 생원·진사 뿐 아니라 유학(幼學)으로 응시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문과 급제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생원은 생원 자체로 만족해야 했다.

직종에 따라서는 문과에 합격하지 않은 생원이라도 천거를 통해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생원으로 충원된 대표적인 관직이 교수직이다. 태종은 동궁의 시학(侍學)과 대군사부를 학행이 있는 생원에서 뽑아 썼다[『태종실록』 1년 8월 22일] [『태종실록』 12년 8월 12일]. 지방의 교수 인력으로 문신이 부족할 경우 목(牧) 이상에는 문신을 임명하고 도호부에는 생원·진사로 충당하도록 하였는데, 40세 이상의 생원을 대상으로 각 도의 감사와 예조(禮曹)의 시험을 거쳐 훈도로 채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2년 10월 23일].

제례와 관련된 자리에도 생원이 충원되었다. 사직령(社稷令)·종묘령(宗廟令)에는 생원·진사 중에서 학식이 있는 자를 가려서 임명하였다[『중종실록』 11년 7월 25일]. 주군(州郡)의 문묘석전(文廟釋奠)에서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를 그 고을에 사는 생원에게 맡기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5년 11월 26일]. 함경도의 육릉(六陵) 참봉은 함경도의 생원·진사로 제수하게 하였다[『숙종실록』 27년 3월 22일]. 생원에게 제수된 초입사직(初入仕職)은 훈도, 참봉 외에 오위장, 별좌, 찰방, 사용(司勇), 도사, 교관(동몽교관, 내시교관)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참봉에 가장 많이 제수되었다.

여러 해 동안 성균관에서 공부하였으나 문과에 합격하지 못한 생원을 대상으로 수학 기간의 성적과 출석 일수를 상고하여 직임을 제수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0일]. 나이 70~80세에 생원에 합격한 경우에는 특별히 대우하였다. 70세가 된 사람은 첨추(僉樞)에, 80세가 된 사람은 오위(五衛) 장(將)에 추천하였다[『정조실록』 14년 9월 12일]. 아주 희귀한 일로 90세에 생원에 합격한 김재봉(金在琫)에게는 급제를 내려 정시(庭試) 문과에 합격한 것과 같이 방방(放榜)하도록 하였다[『철종실록』 12년 4월 10일].

생원은 입사(入仕)와 무관하지만 국가 의례나 형벌에 있어서의 위상은 문무과 합격자나 관료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생원이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유직자(有職者)의 예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7년 12월 7일].

생원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더라도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주로 상소를 통해 여론을 조성하고 정계와 연계되어 정치적 입장 표명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시의에 따른 문제에 민감하게 의사 표시를 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주자학의 정착에 적극적이었다. 1565년(명종 20)에 경기도·경상도·전라도 등에서 승려 보우(普雨)를 처단할 것을 요청하였다[『명종실록』 20년 5월 26일] [『명종실록』 20년 7월 28일] [『명종실록』 20년 8월 14일]. 나아가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여 불교 배척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었다[『명종실록』 21년 4월 13일].

문묘 배향과 관련한 생원들의 활발한 상소 활동은 그들의 존재와 지향점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이들은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5현(賢)에 대한 문묘 배향을 요청하였고[『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14일], 조식(曺植)의 배향을 요청하였다[『광해군일기』 7년 3월 23일].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주장하였고[『숙종실록』 6년 8월 26일], 송시열을 여산(礪山) 죽림서원에 배향하자고 청하였다[『숙종실록』 20년 9월 5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과 사족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항에 대해서는 생원들의 참여가 지속적이며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생원은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서 향촌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마소(司馬所)를 조직하여 정치적 또는 공동체적인 결합을 강화하여 나갔는데, 사마소는 생원·진사들 간의 결속과 지위 유지를 위한 모임이었다. 사마소를 통해 생원은 노비를 두고 재산을 불리며 향리에서 여론을 주도하였다. 법을 침해하기까지 하여 유향소를 압도하고 그 세력이 수령을 능가할 정도에 이르기도 하였다[『인조실록』 4년 8월 4일].

생원은 향교와 서원의 청금록(靑衿錄)을 장악하거나 향회의 일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지방민을 통제하였고, 조세 수납과 군역 책정 등의 지방 행정에도 관여하여 지방관과 결탁 또는 갈등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변천]
조선초에는 생원시 합격을 선망하는 사회 풍조가 있어 이미 관직에 나간 사람들도 생원시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15세기에 생원시 합격자의 22% 정도가 관직 또는 관품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이는 생원시 설치의 본래 목적에는 벗어나는 것이었다. 관리들의 응시를 제한하기 위한 조처로 성종대에는 통덕랑 이하만 생원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것이 『경국대전』에서 법제화하였다. 그 후 관직자의 합격은 점점 줄어들어 18세기 이후에는 1% 미만으로 미미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유학(幼學)의 합격이 증가하여 15세기에 75%, 16세기에 93%, 18세기 이후에는 생원의 99%가 유학 출신이었다.

법적으로 생원시에는 죄를 범하여 영구히 임용할 수 없게 된 자, 장리(贓吏)의 아들, 재혼한 재가녀와 정절(貞節)을 어긴 실행녀(失行女)의 아들과 손자, 서얼 자손은 응시할 수 없었다. 이 가운데 서얼 자손의 경우에만 명종대 이후 생원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명종대에 허통 논의를 거쳐 1583년(선조 16)에는 일정한 양의 쌀을 납부하면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는 납미허통(納米許通)의 조건으로 허용되었다. 1696년(숙종 22)에 납미부거제(納米赴擧制)가 완전히 폐지되어 허통의 절차 없이 서얼 자손도 생원시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으나, 서얼이면서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업유(業儒)를 칭하고 유학을 모칭하지는 못하게 하였다. 1708년(숙종 34)에는 서얼 당대에만 업유를 칭하고 아들 대부터는 유학을 칭해도 무방하게 되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지만 서얼 자손이 생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분제의 변화라는 시대적인 변화에 기인한다.

18·19세기에 이르면 생원을 배출한 지역과 생원 합격자의 연령이 크게 변하였다. 생원은 18·19세기 이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었으며 지방에서는 목 이상의 대읍에서 많이 나왔다. 안동, 충주, 원주, 개성, 상주, 공주, 전주, 남원, 청주, 선산이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개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 이남인데 도별로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의 순으로 생원을 많이 배출하였다.

서울은 18세기 전까지만 해도 45%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는데 18세기 후반 이후부터 지방 출신이 많이 합격하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평안도의 약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평양에서 많은 합격자가 나왔다. 19세기 후반에는 서울 출신이 16%밖에 안 될 정도로 적어졌다.

생원시 합격자의 나이가 후기로 갈수록 많아지는 것도 변화의 하나이다. 평균 연령이 15세기에 29세, 16세기에 29세, 17세기에 33세, 18세기에 36세, 19세기에 38세로 후대로 갈수록 합격 연령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추세에 따라 고령자의 합격도 증가하여 70대와 80대의 노인이 합격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했고 준비 기간도 상당히 오래 걸려 생원 칭호를 얻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 진사 연구』, 집문당, 1998.
■ 송준호, 「이조 생원진사시의 연구」, 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70.

■ [집필자] 최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