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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관료 인사의 공정성을 위하여 관료들을 일정한 범위 내의 친족과 동일 관사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한 제도.
[개설]
조선에서는 인사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관료들을 일정한 범위 내의 친족과 동일 관사나 또는 통속 관계에 있는 관사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관료들은 일정 친족이 관여된 재판이나 시험에 재판관이나 시관이 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피제는 고려부터 시행되어 온 것을 조선에서도 이어받았다. 고려에서는 오복친제(五服親制)를 바탕으로 본족과 모족·처족의 4촌 이내와 그 배우자를 범위로 하여 서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관직에 배치하는 것을 제한하였다. 조선시대 상피제 규정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상피의 범위를 친족·외족·처족 등의 4촌 이내로 한정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에서 상피제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1397년(태조 6) 노비변정도감에서 올린 조목에서였다. 이 조목에서는 쟁송하는 사람이 도감에 상피되는 친족이 있으면 방(房)을 옮겨 결급(決給)하고, 사손(嗣孫)에게 상피되는 자는 형조도관(刑曹都官)이나 사헌부(司憲府)·형조(刑曹) 중 상피되지 않는 곳에 옮겨 보내어 결절(決折)하게 하였다[『태조실록』 6년 7월 25일]. 이 기록을 볼 때,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고려의 상피제를 그대로 따라 시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1414년(태종 14)의 변정도감의 결송(決訟) 사례를 보면 상황에 따라서 상피제는 고려의 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화를 주어서 시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용]
조선에서의 상피제는 1428년(세종 10) 무렵 본격적으로 다듬어진 것으로 보인다. 예조(禮曹)에서 경외관의 상피법은 『원전』에는 본종 삼촌숙(三寸叔)을 『상절』에는 백숙(伯叔)이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여 백숙부로 고치라고 언급하였다. 이때에 다른 제도와 함께 상피제도 다듬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떻게 다듬어졌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1432년(세종 14) 조정에서 분경(奔競)을 논하면서 상피를 언급한 것으로 짐작한다면 고려에 비하여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분경이란 관직을 얻기 위하여 권세가를 찾아다니며 엽관(獵官) 운동을 하던 것을 의미하였다. 세종은 조정에서 분경을 논하면서 만약 분경을 금지하는 범위를 한계로 한다면 인재를 얻기가 어렵게 될 것이니, 마땅히 상피의 예에 따라 사촌까지를 한계로 하여 제수를 허락하지 않도록 하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조선의 상피제가 고려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4촌을 그 범위로 하는 것이었음을 보여 주었다[『세종실록』 14년 3월 25일].
[변천]
상피제는 동일 부서에 일정 범위의 친족이 같이 거하는 것을 문제 삼아 이를 금지하는 것이었으나, 이외에 별도로 관료의 전체 인사에 영향을 미치는 부서들은 정해진 상피제 외의 규제를 가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관료들은 이러한 대상이 되었다. 1441년(세종 23) 사헌부에서는 이제부터 이조·병조의 당상과 낭청의 관원에게 상피되는 사람은 일체 벼슬을 제수하거나 별좌 차임 겸대를 허락하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이는 이조·병조 관원과 의정부의 관료에게는 별도의 규제를 더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1465년(세조 11)에는 사헌부에서 이조·병조 당상관의 상피 범위를 확대할 것을 요청하였다. 사헌부는 “집정 대신에 상피할 사람이 있으면 관직 제수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이미 법령에 나타나 있는데도, 상피하는 것은 단지 4촌에 한하였으니 사람의 사랑하고 미워함이 어찌 촌수의 멀고 가까운 데에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로써 집정 당상의 6촌 이상 족친은 특지 및 조정의 공(功)과 예로써 마땅히 천전(遷轉)하는 자 외에는 상피로 인하여 관직 제수를 허락하지 말아서 모람하는 폐단을 막으라고 하였다[『세조실록』 11년 7월 26일]. 이조와 병조의 당상에게는 4촌이 아닌 6촌의 상피제를 적용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의정부 대신의 상피도 강화하는 추세였다. 1453년(단종 1) 사헌부는 상피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의정부 대신의 아들·사위·동생·조카들은 비록 예에 따라 승천(陞遷)하는 자라도 여러 사람이 모두 의심하니, 의정부 대신에게도 상피하는 법을 세워서 여러 사람의 의심을 막으라고 하였다[『단종실록』 1년 9월 13일]. 이처럼 의정부 대신에 대한 별도의 상피를 강화하도록 요청하였다.
상피제가 만들어지면서 이는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상피제를 규정보다 강하게 운영하기도 하였다. 1478년(성종 9) 지평(持平)안선(安璿)은 지금 남제(南悌)를 이조정랑으로 삼았는데, 판서는 바로 남제의 오촌숙(五寸叔)이고 참의는 육촌제(六寸弟)라고 하면서 비록 상피할 것은 없다 하더라도 의리상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성종실록』 9년 11월 22일]. 이는 6촌까지도 상피를 요청하고 있어 상피제가 규정 이상으로 강하게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상피제가 시행되고, 이조·병조 그리고 의정부의 관료에 대한 별도의 강화된 상피제가 시행되고 있었지만, 당상관 간의 상피는 규제하지 않았다. 당시에 당상관 간에 상피를 피한 이유는 당상관으로 승진하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초에 다듬어진 상피제는 그 큰 틀을 유지하면서 조선후기까지 그대로 운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