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삼포(三浦)

서지사항
항목명삼포(三浦)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대일통제책(對日統制策)
하위어제포(薺浦), 부산포(富山浦), 염포(鹽浦), 삼포윤박제(三浦輪泊制)
관련어삼포왜란(三浦倭亂), 내이포(乃而浦), 삼포왜관(三浦倭館), 왜리(倭里), 항거왜인(恒居倭人), 임신약조(壬申約條), 정미약조(丁未約條), 사량진왜변(蛇梁津倭變), 을묘왜변(乙卯倭變), 개항장(開港場), 포소(浦所), 왜관(倭館)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 세종대 개항한 제포·부산포·염포의 세 항구.

[개설]
개항장을 설치하고 포소(浦所)를 제한한 조선 조정의 목적은 흥리선(興利船)을 통제하고 사송무역(使送貿易)을 규제하기 위해서였다. 초기에는 왜구 회유책의 일환으로 평화적인 통교자에 대해서는 남해안 지역의 어느 포소에서건 자유로이 무역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에 경제적 부담과 군사적 위험 요인이 되자 1407년(태종 7) 흥리왜인(興利倭人)의 개항장을 부산포·내이포 2개 항으로 한정하였다. 이어 1418년(태종 18)에는 염포와 가배량(加背梁)에도 설치하였으나 이듬해인 1419년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왜관(倭館)을 모두 폐쇄하였다.

대마도 정벌 후 대마도주의 간청에 의하여 1426년(세종 8)에는 다시 내이포(제포라고도 함)·염포·부산포 세 곳을 허락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포(三浦)였다. 포소의 설정은 도래왜인(渡來倭人)에 대한 통제책의 일환으로 설치한 것인 만큼 조정에서는 삼포에 한하여 일본 무역선의 내항을 허용하였다.

한편 일본 사신을 맞아 영접하고 필요한 교섭 업무를 수행하는 데도 일정한 장소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도래왜인의 도박처(到泊處), 일본 사신의 접대처[使館], 무역처[商館]로서의 기능을 지닌 왜관을 설치하였다. 삼포에 각각 설치된 왜관을 삼포왜관이라고 하며, 한양에는 상경하는 사송왜인(使送倭人)들을 위하여 별도로 동평관(東平館)을 두었다. 삼포에 왜관을 설치한 이유는 삼포에 왜인들이 많이 왕래하고 일부는 거류하게 되면서 발생할 수 있는 국가 기밀의 누설과 풍속 타락 등을 막기 위해서였다.

[내용 및 특징]
삼포에는 사송왜인을 접대하고 교역 등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관소로서 왜관을 설치하였고, 또 항거왜인을 위한 집단 거류지로서 왜리(倭里)를 허용하였다. 삼포왜관의 기능은 첫째, 일본 사신을 맞아 접대하고 외교 교섭을 행하는 것이었다. 삼포왜관에서는 사송왜인이 도착하면 그들이 소지한 서계(書契)도서(圖書), 대마도주의 문인(文引)을 확인하여 접대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확인하였다. 또 배의 대소(大小)와 선부(船夫)의 수 등도 조사하였다. 규정에 의거하여 그들을 왜관에 받아들여 삼포연(三浦宴)을 베풀고 상경할 수 있는 사람은 허용하였다. 둘째, 조일 간의 사무역을 진행하는 교역처였다. 자격이 확인된 사송왜인 및 흥리왜인들에게 왜관에서 개시(開市)를 열어 교역을 허가하였다. 셋째, 항거왜인의 거주지로서의 기능이었다. 삼포에는 무역을 위하여 도항하였다가 경제적인 이익을 위하여 삼포에 정착한 향화왜인들이 거주하였다. 이들의 수가 증가하자 조정에서는 각 포소에 있는 왜관 주위에 집단 거주지로 허용된 왜리에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게 하였다.

1475년(성종 6) 3월 조사한 항거왜인의 구성을 보면, 남자와 여자의 수가 거의 같고, 어린이로부터 노인·승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거주하였다. 삼포 왜리가 도항왜인들의 무역을 위한 일시적인 거주 지역이 아니라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 단위의 정착촌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면모는 조선후기의 왜관이 400명에서 500명에 달하는 대마도의 성인 남자 외에는 체류할 수 없고 유녀(遊女)의 출입도 금지되었던 금녀(禁女) 구역으로 통제되었다는 점과는 크게 다르다.

우선 조선전기 삼포왜리는 도항왜인의 접대와 교역을 관장한 장소인 왜관과 별도의 지역에 거주지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와 구분되었다. 후기의 초량왜관에서는 모든 왜인들이 6척 담으로 둘러싸인 왜관 내부에서만 생활하도록 규정되었다. 따라서 왜관 안에 왜인들의 민가까지 함께 존재하여 왜관 자체가 축소된 왜인촌(倭人村)으로 조선과 일본 양국민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전기에도 왜관에는 담을 둘러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고, 왜리 또한 조선인 민가와 떨어져 설치되었다.

그러나 왜리에서의 통제는 왜관과 달리 일반인들의 접촉과 교류가 일정하게 허용되었다. 이는 조선전기의 삼포가 후기의 초량왜관과는 구성과 역할 및 성격 면에서 구분이 되는 특성이었다.

[변천]
조선전기 포소와 왜관은 몇 차례에 걸려 설치와 증설과 이전 및 폐지를 반복하였는데, 4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제1기

포소(浦所) 성립기로 1407년(태종 7) 최초의 포소 지정에서부터 대마도 정벌로 인하여 일본인들의 도항이 금지된 1419년(세종 1)까지였다. 포소 제한 논의는 1407년 경상도병마절제사 강사덕(姜思德)이 관내에 있는 각 포소에 대한 시설의 개선책을 상서(上書)하면서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강사덕의 건의에 따라 경상좌도와 우도의 도만호가 거주하고 있는 부산포와 내이포 두 곳을 왜인들의 도박처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조정이 정한 포소 제한 조치가 잘 지켜지지 않고 도항왜인이 더욱 늘어나자 1418년(태종 18) 염포와 가배량 두 곳을 늘려 네 곳으로 포소를 한정하였다. 이어 각 포소에 왜관을 설치하도록 하여 이때부터 한양의 동평관과 더불어 포소왜관이 성립하였다. 이 시기에는 왜관의 체제가 정비되지 않았고 항거왜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왜리가 합법화되지 않았다.

2. 제2기

삼포왜관기(三浦倭館期)로 대마도 정벌 이후 포소를 다시 연 1423년(세종 5)부터 삼포왜란 후 삼포왜관이 폐쇄된 1510년(중종 5)까지였다. 1419년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포소왜관 또한 모두 폐쇄되었다. 그 후 세종의 유화 정책에 입각해 포소의 개방을 간청하는 대마도의 요구에 응하여 1423년(세종 5) 부산포와 내이포의 두 곳을 허락하였다. 이어 계속되는 대마도의 요청에 따라 1426년(세종 8) 추가로 염포를 개방하였다. 이 세 곳의 포소를 통칭하여 삼포라고 불렀다.

조정에서는 변장(邊將)에게 명을 내려 도항왜인들을 엄격히 단속하고 삼포 외에 도박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해적 행위로 간주하였다. 또 1428년(세종 10)에는 도항왜인들이 한 포소에 집중되는 폐단을 막기 위하여 삼포에 나누어 정박하도록 하는 규정이 정해졌다.

특히 대마도주의 세견선 50척은 부산포와 내이포에 25척씩 나누어 정박하도록 하였고, 나머지 사송선은 각각 삼포에 정박하게 하였다. 또한 1442년(세종 24)에는 삼포윤박제(三浦輪泊制)를 시행하여 대마도에서 오는 선박은 내이포·부산포·염포의 순서대로 나누어 정박하도록 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삼포에 거주하였던 항거왜인들의 수가 늘어나자 1436년(세종 18) 이들의 집단 거주지인 왜리를 합법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3. 제3기

이포왜관기(二浦倭館期)로 삼포왜란 후 체결된 임신약조에 의하여 제포가 개방된 후 사량진왜변으로 포소가 다시 폐쇄된 1544년(중종 39)까지였다. 1510년 발발한 삼포왜란 이후 조정에서는 대마도와의 관계를 단절하면서 삼포를 폐쇄하고 항거왜인을 모두 철수시켰다. 1512년(중종 7) 임신약조의 성립으로 외교 관계가 재개되면서 개항장으로 삼포 가운데 제포 한 곳만 개방하였다.

임신약조에는 개항장에 관하여 2개의 조항이 있었다. 제1조에서는 “항거왜인들의 삼포 거주를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제8조에서는 “대마도로부터 제포에 이르는 직항로 외의 다른 곳으로 오는 자는 적왜(敵倭)로 논단한다.”라고 하였다. 이 약조에 의하여 항거왜인의 거주지인 왜리가 종언을 고하였고, 삼포 가운데 제포만이 유일한 포소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후 제포 한 곳에서 도항왜인이 집중되어 인근 고을의 부담이 가중되자 1521년(중종 16)부터는 부산포왜관을 열어 대마도주의 세견선 25척을 부산포 13척, 제포 12척으로 나누어 정박하도록 하였다. 그 후 1544년 사량진왜변이 일어나자 조정은 제포왜관을 폐쇄하였고, 3년 후인 1547년(명종 2) 정미약조를 체결하면서 개항장을 제포에서 부산포로 바꾸었다.

4. 제4기

부산포단일왜관기(釜山浦單一倭館期)로 사량진왜변 후 1547년 대마도주의 제포왜관 재설치 요청을 물리치고 부산포로 한정한 데서부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였다. 사량진왜변 후 조정에서 개항장을 제포에서 부산포로 바꾼 까닭은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제포는 주변에 작은 섬들이 많아 왜인들이 숨어 폐단을 일으키기 쉬운 반면, 부산포는 일망무제(一望無際)하여 왜인들을 통제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부산포는 유일한 개항장으로서 임진왜란까지 지속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에도 유일한 개항장으로서 1872년(고종 9)까지 존속하였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일본 사신들의 상경이 일체 금지되었기 때문에 부산포왜관의 기능은 전기에 비하여 훨씬 커졌다. 전기 삼포의 개항장과 왜관이 수행하였던 기능 외에 대일 업무의 수행이 더해졌던 것이다.

[의의]
왜관을 설치한 이유는 삼포에 왜인들이 많이 왕래하고 일부는 거류하게 됨에 따라 국가 기밀 누설과 풍속 타락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일정한 지역을 지정하여 거류민 거주지와 교역 장소를 한정할 필요가 있었다. 즉, 삼포의 설정과 왜관의 설치는 도래왜인에 대한 평화적 통제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포소와 왜관은 주요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였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인하여 삼포는 철폐되었으며, 항거왜인에 대한 전면 추방이 취해졌다. 이에 따라 삼포의 번영과 항거왜인의 정착촌이었던 왜리도 종식되었다. 1512년 임신약조에 의하여 삼포 가운데 제포만 개항되었다. 1516년(중종 11)에는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부산포 13척, 제포 12척으로 나누어 정박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1544년 사량진왜변 이후 제포에서 부산포로 포소를 바꾸었으며 이후 임진왜란까지 부산포 단일 왜관으로 지속되었다.

조선전기 삼포에서는 왜인들이 조선후기의 초량왜관과는 달리 상주하면서 조선인과 접촉·교류하였다. 항거왜인들은 조선의 문화·풍토·인물에 친숙해졌다. 그들은 조선의 문물에 순치되어 문화 도입을 촉진하였으며, 이러한 요소는 대마도의 문화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
■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
■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지성의 샘, 1994.
■ 이현종, 『조선 전기 대일교섭사 연구』, 국학연구원, 1964.
■ 하우봉 외, 『강좌 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 長節子, 『中世日朝關係と對馬』, 吉川弘文館, 1987.
■ 長節子, 『中世國境海域の倭と朝鮮』, 吉川弘文館, 2002.
■ 佐伯弘次, 『對馬と海峽の中世史』, 山川出版社, 2008.
■ 村井章介, 『中世倭人傳』, 岩波書店, 1994.
■ 장순순, 「조선전기 왜관의 성립과 조·일외교의 특질」, 『한일관계사연구』 15, 2001.

■ [집필자] 하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