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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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史官)

서지사항
항목명사관(史官)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문관(文官)
동의어사신(史臣), 사씨(史氏)
관련어가장사초(家藏史草), 검열(檢閱), 기사관(記事官), 납초(納草), 사관(史館), 사초(史草), 시정기(時政記), 주서(注書)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역사의 초고(草稿)를 작성하던 관리.

[개설]
사관(史官)은 국가의 공식 기록을 담당하였던 예문관의 전임관으로 정7품 봉교 2명, 정8품 대교 2명, 정9품 검열 4명 등 여덟 명을 일컫는다. 넓은 의미로는 사초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찬술하는 사관(史館)·예문춘추관 등에 소속된 수찬관 이하의 모든 관원을 말하며, 좁은 의미로는 사초의 작성과 시정기의 찬술을 담당한 기사관을 겸임한 예문관의 봉교·대교·검열 등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관이라 할 때는 협의의 사관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의 기록과 기록된 내용을 정리·편찬하기 위한 사관의 구체적인 출현 시기에 대해서는 학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체로 중앙집권 체제가 갖추어진 시기에 왕의 주변에서 국가 시행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논의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실제 어떤 모습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집권 체제가 마련된 시기에 당대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의지와 이를 후세에 전해 교훈을 주려는 의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특히 인간이 주체가 되어 전개된 역사에 당시의 실상을 남기려고 했던 노력과 증거는 광범하게 확인되고 있다. 더욱이 사서의 편찬 사실이 확인된다는 것은 사관이 구체적으로 존재했고 또 제도적으로 운영되었을 개연성이 큼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영양왕대 『유기(留記)』, 백제 근초고왕대 『서기(書記)』, 신라 진흥왕대 『국사(國史)』 등의 사서가 편찬되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사를 볼 때, 기록을 담당한 관료의 운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는 집권 체제가 갖추어진 삼국시대에 국가의 공적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행위가 전개되었고, 이와 더불어 사서 편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사서 편찬과 같은 일을 담당하였던 사관도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추측케 한다. 『삼국사기』는 기본적으로 사(事)를 기록한 것이며, 그 기록이 바로 사(史)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담당 직무]
중국에서는 전설의 시대인 황제 때부터 공갑(孔甲)·창힐(倉頡)·저송(沮誦) 등 사관이 있었다. 이들의 실존 여부는 후대인의 구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활동 여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은·주 이래로 태사(太史)·소사(小史)·내사(內史)·외사(外史)·좌사(左史)·우사(右史)·어사(御史)·주하사(柱下史)·주사(州史)·여사(閭史)·여사(女史) 등 다양한 사관의 명칭이 등장하였고, 직무까지 갖추어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 사관은 상고시대에 군왕의 신학적 고문을 담당함으로써 제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는데, 춘추시대 천관 기능이 약화되면서 지위가 격하됐다. 무(誣)와 사(史)가 분리되자 제왕의 관리로서 사관은 점점 왕권의 제도적 권력에 종속되는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사관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함은 물론 왕과 관료들이 모여 국정의 시행사 일체를 기록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설치·운영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문과의 급제를 개인의 입신양명과 가문의 영광을 빛내는 중요한 경로로 인식하였다. 즉 유교 이념이 지배적이었던 조선 사회에서는 상공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보다 문과의 급제를 통하여 관료로 진출하는 것을 가장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로 나가더라도 누구나 청직으로의 진출을 명망으로 여겼다. 청직이란 관리의 비행을 규찰하고 관리 임용 시 서경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헌부·사간원의 대간과, 문장과 학식을 갖춘 사람이 임용되었던 홍문관·예문관·승문원, 그리고 예문관의 전임 관료로 시정사의 기록을 담당하였던 사관 등을 말한다.

이 중 예문관의 전임관으로서 역사의 기록을 담당하였던 사관은 보통 전임사관과 겸임사관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예문관의 정7품 봉교 2명, 정8품 대교 2명, 정9품 검열 4명 등 여덟 명을 말하며, 후자는 영의정 이하 경외 대소 아문에 속하여 소속 관청의 시행사를 정리하여 춘추관에 보고하였던 춘추관 겸직 인사들을 말한다. 조선시대 관료제의 운영에서 전임사관 외에 광범하게 겸임사관을 운영한 것은 전임사관만으로는 서울과 지방에 산재한 관청의 모든 시행사를 기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들 사관은 봉교의 지휘하에 검열 2명이 교대로 승정원·춘추관에 입직하고, 입직하는 검열 이외의 봉교·대교·검열 2명이 춘추관에 상사(常仕)하면서, 국사가 논의되는 조회·조참·상참·윤대, 그리고 경연·중신 회의·백관 회의·의정부·중추원·육조 등 대신이나 삼사 관원이 왕을 면대하는 장소, 왕의 각종 행차 등에 입시·호종하였다.

그리하여 ① 왕의 언동, ② 대신·삼사 관원 등이 논의한 제반 정사, ③ 중앙과 지방의 각 관아·관원이 왕이나 의정부·육조에 보고한 정사, ④ 각종 견문사·비밀사·정치 득실·백관의 인물평 등을 모두 기록하였다. 또 수찬관 이하가 제출한 사초를 종합하여 춘추관 시정기를 찬술하였고, 실록청의 기사관으로서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춘추관과 외방 사고에 보관된 문적을 포쇄하였다.

이외에도 궐내에서의 입직과 관련하여 입시한 사관은 단독으로 혹은 주서·홍문관원·환관 등과 함께 왕명을 받아 ① 소격서·봉상시 등 관아의 제사·기우제·전세 수납 상황·군영 훼손 상황·종묘와 문소전 및 연은전의 방화(防火) 및 장빙사 등의 일을 돌아보고, ② 죄수를 구휼하며, ③ 5부의 진폐(陳弊)를 방구(訪求)하고, ④ 춘추관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 이하 모든 문적을 관리하는 등의 일을 수행하였다.

사관은 군주의 언행을 비롯하여 경외 대소 아문의 시행사와 인물의 시비 득실까지 빠뜨리지 않고 기술하면서 후세에 감계를 주었다. 당대는 물론 만세의 규범으로 인식되는 등 수행한 임무가 중요하였던 만큼 아무나 임명한 것이 아니라 적합한 조건을 갖춘 인사 중에서 선발하였다.

국가의 공식 기록을 담당하였던 사관은 무엇보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임명 조건이 요구되었다. 첫째, 문관으로서 재·학·식의 삼장지재를 갖추어야 했다. ‘재’란 역사 서술 능력을 의미하며, ‘학’은 해박한 역사 지식, ‘식’이란 현실을 직시하여 공정하게 시비 포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상의 삼장지재와 반드시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어야 했다.

주지하듯이 조선 사회에서 명문이 되기 위해서는 국혼, 논공 여부, 명문 간의 혼인 관계, 문과의 급제 등 몇 가지 조건이 요구되었다. 그중 문과의 급제 여부는 조선 사회에서 가문과 개인의 입신양명을 나타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의 하나였다. 역대 사관을 역임한 인사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는 사실은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학문 능력을 갖춘 인재들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가문을 살펴서 흠이 없는 사람, 즉 친가와 처가에 하자가 없어야 했다. 조상 중에 부정축재를 범한 경우나, 서얼 등 출신에 문제가 있으면 절대로 제수되지 못하였다.

셋째, 전임사관의 소속 관청이었던 예문관의 천거 절차가 요구되었다. 1476년(성종 7) 소사식(蘇斯軾)이 전임사관에 천거되었을 때, 예문관의 천거가 없었다는 이유로 제수되지 못한 사례는 이를 증거한다[『성종실록』 7년 2월 4일]. 그러나 비록 예문관의 천거 절차가 있었더라도 천망에 들지 못한 사람, 즉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천거한 사람이 탄핵당하는 것은 물론, 주무 부서인 예문관조차 연루될 정도로 엄격하였다.

넷째, 무과는 물론 음서 출신자도 불가능하였다. 문과의 급제 여부가 학문의 우수성 여부를 가름할 수 있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과가 아닌 무과와 음서 출신자의 경우도 사관에 제수하지 않는 인사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졌던 만큼 사관에 제수된 인사들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다섯째, 평소의 마음 자세와 정직성이 요구되었다. 마음이 사특하다는 이유로 사관에 적당하지 않다는 기사, 사필은 아무나 잡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 잡아야 한다는 기사, 공론에 저촉되는 언사를 일삼았던 인사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는 기사 등은 사관의 자격이 상당히 까다로웠음을 잘 보여준다.

여섯째, 관료 생활 시는 물론 평상시 동료들 간의 원만한 관계 유지 여부 역시 자격 조건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사람이 간사하고 유생 시절부터 동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체되었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조건 외에 문학적 능력이 요구되었다. 이는 첫 번째의 조건에서 거론되었던 재·학·식 중에 역사 서술 능력에 해당되는 ‘재’의 능력과 연관된다. 결국 역사도 문학 영역의 한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능력이 요구되었음은 문·사·철의 기본 소양을 중시하였던 당시 지배 관료층의 인식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리고 사관의 선발을 위하여 1망에 3명이 천거되었을 때, 첫 번째로 의망되지 못한 사람도 불가능하였다.

이와 같은 요건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제수할 때는 더욱 신중을 기하였다. 이는 결원이 생기면 다른 관아의 인사들로 채우지 않고 반드시 별도의 시험을 치른 뒤 보충하였던 사실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변천]
중국에서는 황제 때에 천자와 신하의 좌우에 위치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기록하는 좌사와 말을 기록하는 우사에서 연원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고려 광종 때에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궁내에 사관을 설치한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 이전의 고구려·백제·신라에서도 『유기』·『신집(新集)』·『서기』·『백제본기(百濟本記)』·『백제신찬(百濟新撰)』·『국사』 등이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사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관직과 기능 및 고려와의 연관성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구려 고분 즉, 안악 3호분과 덕흥리 고분의 벽화 중에 사관의 존재를 살필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안악 3호분이 조성된 357년(고구려 고국원왕 27) 전후의 시기에 사관의 설치와 운영이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이와 함께 기록을 남기려는 지배층의 의식이 상당히 강했음도 살필 수 있어 주목된다.

한편 고려 광종 때에 설치된 사관은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계승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개칭되면서 운영되었다. 고려시대에는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예문춘추관, 1325년(고려 충숙왕 12)에 춘추관,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사관,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춘추관, 1392년(태조 1)에 예문춘추관, 1401년(태종 1)에 춘추관으로 개칭된 뒤 조선말기까지 유지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관제 개혁에 따라 의정부 소속의 편사국(編史局)으로 개편되었다.

[의의]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다. 사관의 여러 임명 조건 중 동료 간의 유대와 원만한 인간관계가 요구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국가의 공식 기록은 정확하게 기록되어야 한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대사인 『조선왕조실록』은 객관적인 태도와 도덕적인 성품의 인사에 의해 정리되고 서술되어야 한다는 의식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사관의 임명 시에는 ‘삼장지재’와 문과의 급제 여부 등 학문적인 면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행동거지를 살펴 올바른 사람을 택했다. 이는 사관이 관료라는 점 외에, 당대 역사 사실을 정리하여 후세에 영원히 권계하는 일을 수행하는 인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사관의 기록 내용에 따라 시정사나 인물의 시비가 가려지고 포폄되는 것은 물론, 당대와 후세에 전해져 큰 영향을 주었다. 당대 발생한 역사 사실을 객관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에 의거하여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주관적인 판단으로 또 권력에 아부하여 기록하게 되면, 현실 정국은 물론 후세에도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관은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 제수되었고, 당시 관료 사회에서 청직으로 인식되었던 것만큼 이에 임명된 사람들은 철저한 사명감과 긍지, 자부심을 가지고 임무를 수행하였다. 정사와 경연이 이루어지는 장소에는 반드시 입시하여 기록하였으며, 권력을 가진 자들이 권력의 힘을 빌려 사초의 개수를 요구하는 경우라도 붓을 꺾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없었다. 철두철미한 조선시대 사관>들의 기록 정신에 힘입어 광범한 조선시대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관제의 운영은 왕의 언동, 시정의 득실, 인물의 현·불초 및 비밀에 관한 사실 등을 견문한 바대로 직필하여 후세에 권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469년(예종 1)의 민수사옥과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 1547년(명종 2)의 안명세 사옥, 당쟁의 와중에 벌어진 『선조실록』, 『현종실록』, 『경종실록』 등의 개수와 같이 필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직필 활동은 기본적으로 국왕과 관료들의 전자(專恣)·비리를 견제함으로써 유교의 덕치 구현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참고문헌]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연구』, 국학자료원, 1998.
■ 오항령, 『한국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9.
■ 김성준, 「고려 7대실록 편찬과 사관」, 『민족문화논총』 1, 1981.
■ 손보기, 「군주와 사관 -이세민과 이방원을 중심으로-」, 『사학회지』 6, 1964.
■ 정구복, 「조선초기의 춘추관과 실록편찬」, 『허선도선생정년기념논총』, 1987.
■ 차용걸, 「조선왕조실록의 편찬태도와 사관의 역사의식」, 『한국사론』 6, 1979.
■ 차장섭, 「조선전기의 사관 -직제 및 정치적 역할-」, 『경북사학』 6, 1983.
■ 한우근, 「조선전기 사관과 실록편찬에 관한 연구」, 『진단학보』 66, 1988.

■ [집필자] 김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