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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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소(浮石所)

서지사항
항목명부석소(浮石所)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부석(浮石)
관련어대부석소(大浮石所), 산릉도감(山陵都監), 소부석소(小浮石所), 수석소(輸石所), 장인(匠人)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건축 공사나 산릉 조성 공사 때 원자재인 석재를 뜨고 가공하는 일을 맡았던 기구.

[개설]
‘부석(浮石)’은 돌 뜨는 일을 말하는데, 채석(採石)과 같은 의미이다. 부석소(浮石所)는 석재를 떠서 필요한 형태로 가공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특히 조선후기에 산릉을 조성할 때는 대부석소, 소부석소로 구분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름 그대로 대부석소는 큰 돌을 쓰는 공역을 담당하였는데, 묘소를 조성하는 데 사용하는 석재와 문인석과 무인석, 양석(羊石)을 비롯한 각종 석물을 제작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소부석소는 묘소 주변에 짓는 정자각을 비롯한 건물에 쓰이는 초석과 같은 작은 건축용 석재를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부석소에는 제일 중요한 석수(石手) 외에 야장(冶匠), 각수, 마석장 및 조각장이나 화장이라고도 불린 섭장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부석소는 업무에 따라 대부석소와 소부석소로 구분되었다. 대부석소는 전적으로 능상의 석물을 주관하고, 소부석소는 정자각과 재실 등에 사용되는 석재를 관할하였다. 즉 석물 자체의 크기도 기준이 되겠지만, 그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능상의 석물은 대부석, 그 외의 석물은 소부석으로 차이를 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대부석이란 용어는 1600년(선조 33)에 인산도감에서 대부석을 운반하는 문제가 불거지면서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선조실록』 33년 10월 17일].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에 따르면 부석소는 좌우로 구분되었는데, 그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좌우 통합 편수[邊首]가 좌부석소에 속해 있어 우부석소보다 좌부석소의 위계가 높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7세기 중반인 1659년(현종 즉위)에 효종의 영릉(寧陵)을 조성할 때까지는 이처럼 좌·우부석소로 나뉘어 업무를 수행하다가, 그 이후부터는 대부석소로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673년(현종 14)에 좌·우부석소 감조관의 잘못을 논죄한 기사가 있어[『현종개수실록』 14년 5월 1일], 이때까지도 부석소를 좌우로 나눠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대부석소에는 제일 중요한 업역인 석수 외에 야장, 섭장, 각수, 마석장 등도 소속되어 있었다. 야장은 장인들이 사용하는 도구나 금속 장식을 제작하였으며, 각수는 돌 표면에 글씨 새기는 일을, 마석장은 석재의 표면을 곱게 가는 일을 수행하였다. 석물을 조각하는 섭장은 1675년(숙종 1)에 현종의 숭릉(崇陵)을 조성할 때부터는 화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한성부 장적(藏籍)에 등록되어 있는 우수한 경장(京匠)이 대부분이었다. 18세기에는 대·소부석소에서 각 석물에 맞는 돌을 떠서 규모와 형태를 갖추고 나면, 이후 세세한 가공은 화장들이 맡아 처리하였다. 19세기에도 석물을 조각할 때는 화원(畫員)이 그린 기화(起畵)를 바탕으로 섭장이 정교하게 다듬는 일을 수행하였다. 섭장이란 명칭은 대부석소에서 석물을 다듬을 경우에만 부르는 명칭으로, 기술은 같지만 조각할 대상에 따라 장색(匠色)의 명칭을 달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돌은 뜨는 일도 어렵지만, 운반에는 더욱 많은 힘이 들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1626년(인조 4) 기사에는, 산릉의 큰 석물을 운반하는 데는 2,000명 정도가 소요되는데, 모군(募軍)만으로는 제때 일을 처리하기가 어려우므로 남한산성의 승군(僧軍)을 투입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 보인다.

1660년(현종 1)에는 산릉을 조성한 지 겨우 1년이 지났는데, 능 위의 석물들이 내려앉거나 틈이 벌어졌다. 또 정자각의 기와도 색이 붉어진 것이 태반이며, 바른 석회가 깨지고 떨어진 곳이 매우 많았다. 그에 따라 붉은색 돌을 캐낸 부석소의 감역관과 석공을 비롯해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현종실록』 1년 7월 25일].

[변천]
산릉 공사는 그 특성으로 인해 다른 어떤 분야보다 석수가 많이 동원되었다. 부석소에 소속된 장인은 대체로 도성이나 인근에 사는 경우가 많았고, 기록에 드러난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 집안에서 세습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석수의 명단을 일일이 싣지 않고, 대표 석수만 이름을 명기하고 나머지는 패 또는 숫자로 적는 경향이 나타났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
■ 문영식, 「조선후기 산릉도감의궤에 나타난 장인의 조영활동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집필자] 이경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