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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대명률』의 형벌 체제는 태(笞)·장(杖)·도(徒)·유(流)·사(死)의 5형(刑) 체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5형 중 가장 무거운 형벌인 사형(死刑)은 다시 교형(絞刑)과 참형(斬刑)으로 구분되었으며, 반역(反逆)·강상(綱常) 죄인은 능지처사(陵遲處死)에 처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책형(磔刑)·거열(車裂)·효수(梟首)·약살(藥殺) 등과 같이『대명률』의 규정 외의 사형이 시행되기도 했다.
형벌의 집행은 죄수(罪囚)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죄인이 고문 등에 의해 형을 집행하기 이전에 죽게 된 경우에는 사후(死後)에 형을 부과하기도 했는데, 이를 추시형(追施刑)이라 하였다. 부관참시도 일종의 추시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죽은 자의 관(棺)을 열고 시신을 꺼내어 목을 베고 뼈를 잘게 부수어 날려 보내거나, 혹은 시신을 강에 버리기도 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부관참시가 많이 시행되었다. 1498년(연산군 4)에는 신진 세력이었던 사림파(士林派)를 대거 제거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는데, 이때 이미 사망한 김종직(金宗直)을 부관참시에 처했다. 그리고 1504년(연산군 10)에 폐비윤씨(廢妃尹氏)의 복위(復位) 문제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에서는 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남효온(南孝溫) 등의 시신이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1506년(중종 1)에는 의금부(義禁府)의 건의에 따라 갑자사화의 주역(主役)이었던 임사홍(任士洪)을 부관참시하고 그의 가산(家産)을 몰수했다. 당시 중종은 부관참시가 원래는 드물게 쓰인 형벌이었는데 요즘에는 보통의 형벌이 되었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1759년에 영조(英祖)는 추시형을 폐지할 것을 명하였고, 이것이 후에 정조(正祖) 연간에 편찬되는 『대전통편』에 수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