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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봉사(奉祀)는 봉제사(奉祭祀)의 줄임말로 제사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 고려조의 봉사 방식이 조선의 양반가에 계승되었으나, 조선은 가례(家禮)를 받아들여 옛 제도와 융합하였다. 조선에서는 기제사(忌祭祀)를 비롯하여 다양한 종류의 제사가 행해졌는데, 시기에 따라 중시 여기는 제사의 종류가 달랐다. 또 봉사 방식도 변하였는데, 이러한 변화는 조선시대 가족제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지내는 제사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주로 기제사·시제(時祭)·묘제(墓祭) 등이 일반적으로 봉행되었다. 기제사는 망자(亡者)의 사망일에 지내는 제사이며, 시제는 사계절의 중간 달에 선조에 대해 지내는 제사이고, 묘제는 선조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를 일컫는다. 이 밖에도 생휘일제(生諱日祭)나 절일제(節日祭) 등이 있다.
『경국대전』에는 품계에 따른 차등 봉사 규정이 있는데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 봉사, 서인(庶人)은 죽은 부모만을 제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예전(禮典)」 ‘봉사(奉祀)’조에 제사의 종류를 지정하지 않고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양반가의 기제사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양반가에서 16세기까지 3대 봉사를 유지해온 사례가 확인된다. 17세기 이후에는 품계와 관계없이 대부분의 양반가가 4대 봉사로 봉사의 대상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시제는 주자(朱子)의 『가례』에서 가장 중시한 제사로, 고조 이하의 원조(遠祖)를 가묘에서 합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1년에 4차례, 2월·5월·8월·11월에 지냈다.
그 밖에 『가례』에는 없는 우리나라 전통 제사인 생휘일제와 절일제도 지냈다. 생휘일제는 생기일제(生忌日祭)라고도 부르는데, 망자가 태어난 날 지내는 제사이다. 16세기 이문건(李文楗) 집안을 비롯하여 생휘일제를 지낸 사례를 일기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조선후기에는 이 제사를 지낸 사례가 그렇게 많지 않다. 주로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서만 지냈는데, 고려의 불교적 조선(祖先) 의식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제사라 할 수 있다. 절일제는 설·단오·추석·동지에 지내는 제사로 사명절제(四名節祭) 또는 사명일제(四名日祭)라고도 부른다. 이 역시 유교적 의례 이전에 이미 설행되어 온 전통적인 제사이다.
한편 묘제(墓祭)는 『가례』에 제사의 대상이나 주제자(主祭者)에 대한 명확한 언급 없이, 3월 상순에 택일하여 제사한다고만 명시되어 있다. 1년에 한 번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까지 양반가에서는 설·단오·한식·추석 등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를 모두 묘제로 지칭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경부터 1년에 한 차례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로 묘제의 의미가 변화하고, 묘제의 대상 역시 4대 봉사를 마치고 체천(遞遷)한 원조로 바뀌었다. 즉 4대 봉사가 정착된 이후에 묘제의 의미가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전기의 봉사 방식은 윤회봉사(輪廻奉祀)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봉사 방식이 계승된 것으로, 재산의 균분 상속과 함께 조선전기 가족제의 큰 특징이다. 윤회봉사란 아들·딸, 장자·차자 등 성별과 순서에 관계없이 모든 자녀가 조상 제사를 돌아가며 봉행하는 형태를 말한다. 전술한 이문건가에서는 외조부모 기제사도 지냈는데 이처럼 16세기까지 양반가에서는 딸, 그리고 외손이 아들·친손과 마찬가지로 봉사를 담당하였다. 재산을 균분 상속할 권리를 아들과 딸이 동등하게 가졌고, 선조를 봉사할 의무 역시 동등하게 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17세기 중반 이후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윤회봉사에서 딸이 조금씩 제외되기 시작하여 일부 제사에서는 아들만 윤행(輪行)하고, 그중 일부 제사는 장자가 단독으로 봉행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하지만 장자 단독 봉사로 완전히 이행하지는 못하고, 딸을 제외시키고 아들만 제사를 윤행하는 단계가 꽤 오랜 시간 유지되었다. 그와 보조를 맞추어 재산 상속 역시 균분이 해소되어 딸에게는 재산을 적게 주고 아들 간에만 균분 상속을 지속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이후 재산 상속과 봉사가 장자 위주로 재편되는 시기는 19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하지만 17세기까지 분재기 자료가 재산 상속과 봉사의 실제를 상세히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18세기 이후에는 분재기가 감소하므로 이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변천]
16세기까지는 대체로 고려시대의 봉사 관행이 지속되는 경향이 강했다. 생휘일제의 봉행 등 전조의 제도가 남아있었고, 딸이나 외손이 윤회봉사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 역시 이전 제도의 계승이었다. 봉사 방식도 고려후기 이래 조선전기까지는 아들딸 구분 없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제자녀윤회봉사(諸子女輪廻奉祀)로 규정할 수 있다. 대체로 17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아들만 돌아가며 제사 지내는 제자윤회봉사(諸子輪廻奉祀)로 변화하였고, 다소 불완전하지만 봉사 방식이 장자 위주로 개편되어 3단계의 변화 과정을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봉사 방식만의 변화가 아니라 17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성리학적 종법제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족제 전반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제반 조건과 연동하여 인과 관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가례(家禮)』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최재석, 『한국 가족 제도사 연구』, 일지사, 1983.
■ 김경숙, 「16세기 사대부 집안의 제사 설행과 그 성격: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黙齋日記)』를 중심으로」, 『한국학보』 98, 2000.
■ 정긍식, 「조선 초기 제사 승계 법제의 성립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