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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조선의 공식적인 관리 등용법으로는 과거(科擧), 천거(薦擧), 이임 취재(吏任取才), 음서(蔭敍)가 있었다[『성종실록』 9년 4월 8일]. 천거는 보거(保擧)로도 불렸는데, 이것은 후보자를 천거할 때는 천거된 자의 자질에 대하여 천거한 관리가 연대책임을 지는 보증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보거는 대부분의 인재 등용에서 사용되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하더라도 실제 관료로 등용될 때에는 보거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보거를 확대해야 한다거나 축소해야 한다는 논쟁이 조선 내내 끊이지 않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보거는 중국 한나라에서 처음 제도화되었다. 과거제가 도입된 후 보거제는 위축되었지만, 인사제도에서 보거제는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천거는 주관적인 등용제도이며 과거는 객관적인 등용제라고 해서 서로 대립적인 제도로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 급제자, 취재 및 문음 취재(取才) 합격자, 천거 받은 인재는 바로 등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관리 등용 후보자 자격을 얻는 데 불과하였다. 그들이 관료로 등용되려면 다시 매년 정기적으로 인사행정을 하는 도목정(都目政) 때 관료의 천거를 받고 인사 심의를 거쳐야 했다. 이를 위하여 보거법이 필요하였다. 또 과거로 등용할 수 없는 다양한 인재를 추천하기 위해서도 보거법이 사용되었다.
[내용]
보거는 관리 후보자를 천거하는 보거와 도목정 때 관직별로 정해진 기준에 관직 후보자를 천거하는 두 경우가 있었다. 전자는 유일(遺逸) 천거, 효렴(孝廉), 순손(順孫)의 천거가 있었다. 후자는 중앙 관리와 지방 관리의 관리 후보 천거, 지방관 후보자 천거와 문음 자제(子弟) 천거가 있었다.
조선건국 후 『경제육전』에서는 유일 천거를 상례화하여 매년 2번 도목정 때마다 6품 이상의 모든 관리가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그러나 태종대 이후로 천거 시기와 천거 자격자가 축소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동서반 3품 이상이 3년마다 맹춘월(孟春月)인 음력 1월에 3명씩 천거하게 했다. 수령과 만호(萬戶) 후보자는 동반 3품과 서반 2품 이상이 매년 3명 이하를 천거하게 했다. 천거 주체를 고위 관료군으로 제한한 것이었다. 또 충훈부(忠勳府)에서는 공신 자제 중에 수령직 후보자를 추천하게 하였다.
지방에서는 식년(式年)마다 전직 관료와 생원·진사·유학 중에서 인재를 수령에게 천거하고 수령이 관찰사를 경유해 조정에 천거하게 하였다. 그러나 천거된 인원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는 3명 이하, 나머지 도는 2명 이하였다.
관료로 임명된 사람이 부정을 저지르면 천거자도 함께 처벌을 받았다. 이를 거주연좌제(擧主連坐制)라고 하였다. 처벌은 『대명률직해』에 의하면 잘못 천거한 자 1명마다 장(杖) 80대이며, 3명마다 10대씩 높여 최대 장 100대까지 벌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불합리하다고 해서 잘 시행되지 않았고, 1412년 천거받은 자가 패륜이나 뇌물을 받는 죄를 저질렀을 경우만 천거한 사람을 처벌하게 하였다. 단 천거받은 자가 가내사환자(家內使喚者)나 출신이 불분명한 자인 경우는 모든 범죄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지게 하였다. 이 규정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하지만 천거한 사람이 실제 관료인 경우에는 장형을 받기보다는 수속으로 처리되었으며, 관직에서 파직되기도 하였다.
가장 많이 연루되는 관직은 부정을 저지르기 쉬운 수령직이었다. 그러나 거주연좌제는 잘 시행되지 않았다. 거주연좌로 탄핵을 받은 경우도 많지 않았고 처벌받은 자는 더욱 적었다. 보통은 정치적 이해에 따른 처벌이 많았다.
『속대전』에서는 과거 응시자에게도 보거법을 적용해서 과거 때 부정을 저지르면 천거한 자를 처벌하게 하였다. 전임 관직에서 인수인계서인 해유(解由)를 제출하지 않은 사람은 후보자로 천거받을 수 없었다.
[변천]
보거제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인사제도가 너무 넓으니 축소해야 한다는 논쟁과 반대로 너무 좁아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조선시대 내내 맞섰다. 이것은 정치적 이해에 따른 차이로 보인다. 조선후기에는 과거제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권력이 세도가에게 독점되면서 과거제를 보거제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등장하였다. 최한기(崔漢綺)는 과거를 철폐하고 보거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성호사설(星湖僿說)』
■ 『인정(人政)』
■ 임용한, 『조선 전기 관리 등용 제도 연구』, 혜안, 2008.
■ 정구선, 『(조선시대) 천거 제도 연구』, 초록배,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