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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에 새로 급제한 사람을 박사 세 사람이 채점하여 승문원·성균관·교서관 등에 배속시켰으며[『중종실록』9년 11월 15일], 홍문관의 박사는 『홍문록』 작성 시 정8품의 저작(著作), 정9품의 정자(正字) 등과 함께 합당한 사람을 선발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12년 11월 25일]. 『경국대전』 「예전(禮典)」 ‘제과(諸科)’에 의하면, 생원시·진사시의 복시(覆試) 때 성균관 박사 이하의 관원이 예문관(藝文館)·승문원·교서관의 7품 이하 관원 및 감찰과 함께 강독을 시험하였다.
[변천]
박사는 고조선과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조선의 박사는 고려 성종 때 국자감(國子監)에 박사, 대학박사(大學博士), 사문박사(四門博士)를 둔 것에서 기원되었다. 고려의 박사는 이후 문종대에 서운관(書雲觀)과 태의감(太醫監)에도 설치되고 또 그 기능과 관련되어 직명과 관품이 구분되었다. 국자감에는 정7품 국자박사, 종7품 대학박사, 정8품 사문박사, 종9품 서학(書學)·산학박사(算學博士), 서운관에는 종9품 복박사(卜博士), 태의감에는 종8품 박사와 종9품 주금박사(呪噤博士)가 두어졌다. 문종대의 이 박사들은 이후 1372년(고려 공민왕 21)까지 새로이 봉상시에 종7품 박사가 설치되었다가 혁거되는가 하면 국자감이 성균관으로 개칭되고 여러 박사가 설치되었다가 혁거되는 등으로 변천되면서 성균관 박사·순유박사(諄諭博士)를 제외한 모든 관아의 각종 박사가 개칭되거나 혁거되었다.
조선은 1392년(태조 1) 개창과 함께 고려말의 관제를 계승하여 학교·이업(肄業) 등의 일을 관장하던 성균관에 정7품 박사 2명, 종7품 순유박사 2명, 정8품 진덕박사(進德博士) 2명을, 종묘·제향 등의 일을 관장하던 봉상시에 정6품 박사 2명을, 진시(診視)와 화제(和劑) 등의 일을 관장하던 전의감에 종8품 박사 2명 등을 두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01년(태종 1)에는 봉상시의 박사를 주부(主簿)로 하였고[『태종실록』 1년 7월 13일], 1411년에는 성균관 순유박사를 혁파하였다[『태종실록』 11년 6월 19일]. 1417년에는 이문(吏文)의 예습(預習)과 사대문서(事大文書) 제술 등의 일을 주관하던 승문원의 종7품 정자를 정7품 박사로 고쳤다[『태종실록』 17년 6월 11일].
『경국대전』에는 성균관 3명, 홍문관 1명, 승문원 2명, 교서관 2명의 총 8명의 정7품 박사가 규정되었다.
이 박사들이 이후 교서관 박사가 규장각 외각(外閣) 관직이 된 것 이외는 변동 없이 그대로 계승되다가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때 모두 폐지되었다. 그러나 성균관 박사는 1898년 학부 부속기관인 성균관에 다시 설치되어 1907년까지 존속되었다. 1905년(광무 9) 칙령 제23호에 의하면, 성균관 관제에 칙임관인 관장 1명, 판임관인 교수 3명·박사 3명·직원 2명 등을 두었다. 이 중 박사는 경학과에서 선발된 유생, 중앙과 지방의 각 도에서 3년에 한 차례 진행하는 경(經)의 문답 혹은 시무책(時務策)에서 선발된 사람, 평소 중앙과 지방의 각 도에서 학식이 많고 노숙한 유생으로 선발된 사람을 순차로 임명하였다[『고종실록』 42년 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