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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문음은 아버지·할아버지의 음덕(蔭德)으로 입사(入仕)를 허용하던 제도였다. 고려시대에 문무 5품 이상의 직자(直子)에게 허용하던 문음제도는 조선에 이르러 문무 3품 이상으로 축소되었다. 그 특혜는 문과 합격자와 동등하였다. 자격은 나이가 20세 이상이어야 하며, 취재(取才)에 합격하여야 했다. 취재는 사서오경 중 각 하나를 택하여 치르는 강경(講經)시험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원육전(元六典)』에 의하면, 홍무(洪武) 25년 7월에 상정(詳定)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 ‘모든 문음 출신자로서 본년 본월일 이후부터 실직(實職) 3품 이상을 받으면 그 자손은 음직을 받는 것을 허용한다.’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1년 12월 3일]. 홍무 25년은 태조 1년인 1392년이었다. 따라서 문음제는 조선건국 직후에 바로 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으로, 조선건국에 크게 공헌한 관료들을 우대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의 서문에 ‘과목(科目) 외에는 유일(遺逸) 천거와 문음(門蔭), 성중애마(成衆愛馬)의 선보(選補), 남반잡로(南班雜路)의 승전(陞轉)이 있어 진출하는 길이 하나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서문은 문관의 벼슬길을 언급한 것이었다. 문음지서는 곧 문관 벼슬길의 하나로 제도화 되어 있었다. 태조대 출사로(出仕路)로써 설치된 7과(科) 중 첫번째가 문음(文蔭)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문음제를 얼마나 중시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문음제의 시행 목적은 『삼봉집(三峰集)』에 잘 표현되어 있었다. 『삼봉집』의 「조선경국전」 입관(入官) 조에 “장상(將相)과 대신(大臣)은 모두 백성에게 공덕이 있고, 또 그들의 자손은 가훈을 이어받아서 예의를 잘 알고 있으므로 모두 벼슬을 할 만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설치하였다.” 하였는데, 백성들에게 공덕이 있는 장상과 대신들을 우대하기 위한 목적이 첫번째이며, 그 자손들은 예의로써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들을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용]
문음의 자격은 공신(功臣) 및 2품 이상의 자(子)·손(孫)·서(壻)·제(弟)·질(姪)과 실직(實職) 3품인 자의 아들과 손자, 일찍이 이조(吏曹)·병조(兵曹)·도총부(都摠府)·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부장(部將)·선전관(宣傳官)을 거친 자의 아들이었다. 원종공신(原從功臣)의 경우는 아들·손자에만 한하였다. 나이는 20세 이상이어야 하며, 이들에게 시험을 보여 서용하였다. 시험의 강(講)에는 오경(五經) 중 하나, 사서(四書) 중 하나를 택하도록 하였다. 이 시험이 음자제(蔭子弟) 취재(取才)로서, 매년 정월에 실시하였다. 녹사(錄事)에 속하고자 하는 자는 이를 들어주었다.
[변천]
고려 성종대에는 문무 5품 이상의 직자(直子) 1명에게 음관을 허락하고, 재추 및 문무 3품으로 퇴직하여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의 직자 1명에게도 음관을 허락하였다. 아울러서 4품 및 급사중승(給舍中丞)과 제조(諸曹)의 낭중(郎中)·중랑장(中郞將)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자는 시직(試職)과 섭직(攝職)을 논하지 말고 아들 1명에게 음관을 주며, 직자가 없을 경우에는 생질 등 1명에게 초직(初職)을 허락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문음제도를 수용하였으며, 문음 출신자에게 문과 합격자와 동등한 대우로 벼슬길에 처음 나오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1392년(태조 즉위년)의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과 1397년(태조 6)에 편찬된 『경제육전』에는 문음제가 수록되어 이미 법제화되어 있었다. 『육전』의 규정에는 “문음으로 벼슬을 제수하는 자는 나이 18세이고, 경서 하나로 시험하여 능히 대의(大義)를 통하여야 바야흐로 등용을 허락한다.”라고 하였다. 또 “무릇 문음 출신은 홍무 25년(태조 즉위년) 7월 이후부터 그 조부(祖父)가 실직을 받았던 자이면 이미 작고하였거나 퇴임하였거나를 불문하고, 정·종1품이었던 자의 맏아들은 정·종7품을, 정·종2품이었던 자의 맏아들은 정·종8품을, 정·종3품이었던 자의 맏아들은 정·종9품을 주고, 만일 맏아들이 유고(有故)하면 맏손자에게 한 등 낮은 관품을 주고, 둘째 아들에게도 그리하는데 경직(京職) 외직(外職)을 분간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세종실록』 7년 7월 15일].
이 규정을 통하여 문음 출신자가 처음 제수받은 관품을 문과 합격자가 처음 제수받은 관품과 비교해 보면, 문과 갑과(甲科)·을과(乙科)·병과(丙科) 합격자는 같았다. 문음 출신자는 아버지·할아버지의 관품 1품부터 3품까지의 순서에 따라 정·종 7·8·9품을 받았는데, 문과 합격자의 갑·을·병과의 처음 관품도 정품만으로 7·8·9품을 받았던 것이다. 18세 된 문음 자제는 예문관에서 실시하는 취재 시험에 경서 1권만 통(通)해도 문과례에 따라 패(牌)를 지급하고 벼슬살이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3년 7월 12일]. 이 같은 문음 출신자에 대한 대우는 관료제의 강화와 과거제의 중시 경향에서 볼 때, 파격적인 조처로서 당시 양반 지배층의 지대한 관심의 반영이었다. 가문과 혈통을 배경으로 관직에 나가는 문음 출신들의 신분적·지배적 지위를 국가 차원에서 안정적으로 보장해 주는 방책이 문음이었던 것이다.
문음 출신자의 첫 관직은 권지(權知)였다. 이것도 문과 을·병과 합격자의 권지 분관(分館)과 같은 동등한 대우였다. 권지로써 분관한 급제자들은 특별한 재능이 없거나 문벌의 배경이 없는 한 진출이 빠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10여 년 동안 공부해서 문과에 급제하여 삼관에 분관되면 권지로서 6~7년을 지내야 비로소 9품을 받고, 그러고도 4~8년을 더 근무해야 6품으로 올라갈 수 있었으니, 30~40세에 급제한 사람은 삼관에서 늙어 버리기 쉬운 것이 문과 합격자의 처지였다[『태종실록』 10년 10월 29일]. 오히려 문음 출신들은 문과 합격자에 비하여 출세에 유리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 문음 출신과 문과 합격자의 권지직은 전자가 행정 부서로 분산 입속되었던 데 반하여, 후자는 삼관(후에 사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차이점이었다. 문음 출신의 청요직 진출 제한도 이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문음 출신자와 문과 합격자는 직능과 역할상의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음 출신의 첫 관직은 직사가 있는 동반직이었다. 직사가 있는 동반직은 무록관(無祿官), 권무·권지직, 성중관, 겸관직(兼官職) 등을 포함하였다. ‘공신 자제의 의순고별좌(義順庫別坐)’라고 한 기사 등에서, 별좌는 공신 자제와 내수, 성중관 등에게 제수되었다[『태종실록』 1년 5월 2일]. 별좌는 무록의 체아직으로서 3품 이하 6품 이상의 참상 권지직이었다. 1466년(세조 12)의 관제 개편으로 권지직이 혁파되었으나, 별좌는 그대로 존속하였다. 그런데 성종조의 기록에는 별제·별검 등의 새로운 관명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관직은 별좌가 참상직인데 반하여 참하직으로 설치된 것으로, 아마도 참하 권지직의 혁파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동정직 제수와 성중관 입속 허용, 세조 연간의 관제 개편 등으로 문음제가 보완된 것은 오히려 문음 출신이 처음 제수받는 관직의 한계를 완화하여 그 범위를 확대시켜 준 것이었다. 문음 출신의 첫 관직이 참봉 중심제로 개혁된 것 또한 문음 출신의 현실적 처우 개선이 보다 안정된 방향으로 변화를 이루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사림 정치가 시작되면서 문음 출신들은 승진에 제약을 받는 등 관료로서의 지위가 약화되었다. 한 예로, 1529년(중종 24)에 육조의 낭관에 문음인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하여 정랑은 문신으로 대체하고 좌랑은 한꺼번에 교체할 수 없으니 섞어서 차임하도록 한 사실을 들 수 있다[『중종실록』 24년 1월 13일]. 그리고 문음 취재에 대간이 참석하도록 하여 시험 감독을 강화함으로써, 문음 출신의 입사(入仕)를 억제하고자 하였다[『명종실록』 8년 4월 21일]. 이러한 문음제는 조선후기에 삼반제(三班制)의 시행으로 강화되기도 하는 등 부침을 거듭하다가, 1865년(고종 2)에 가서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용선, 『고려음서제도연구』, 일조각, 1991.
■ 박홍갑, 『조선시대 문음 제도 연구』, 탐구당, 1994.
■ 이상은 편, 『韓國歷代人物傳集成』, 민창문화사, 1990.
■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 이재룡, 『조선 초기 사회 구조 연구』, 일조각, 1984.
■ 임민혁, 『조선시대 음관(蔭官) 연구』, 한성대학교 출판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