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대체로 대문, 성문과 같이 판문으로 이루어진 문의 문짝을 문비(門扉)라고 한다. 『성종실록』 20년 기사와 『중종실록』 5년의 기사 등은 모두 성문에 대한 용어로 사용된 사례이다. 『경재유고(敬齋遺稿)』에 실린 「종묘추석제겸행신주천진급제이실문비개배고유문(宗廟秋夕祭兼行新酒薦進及第二室門扉改排告由文)」에서는 종묘의 각 실에 다는 문을 문비라 하였다. 또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에는 문비의 수량이 기록되어 있는데 정자각(丁字閣) 주변에 설치된 홍문(紅門)에 달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인조실록』 3년의 선릉(宣陵) 정자각 정문에 화재가 일어나 문비 한 짝이 소실되었다는 기사에서는 정자각의 문짝 역시 문비로 표현하였다. 또한 1422년(세종 4)에 정리한 산릉(山陵)의 제도에서 문비석은 석실의 남쪽에 위치하는 석실의 정문이 된다.
그림 문비석
[용례]
山陵制度 尺用營造尺 石室內廣八尺 高七尺 長十一尺 (중략) 門扉石二 高各七尺 廣各三尺五寸 厚各一尺 門倚石一 高七尺 廣七尺 厚二尺[『세종실록』 4년 9월 6일]
戶曹據平安道觀察使李克墩關啓 本道若有虜變 江界城必先受敵 其南北二門 宜固其扃鐍 以絶窺覦之心 請以鐵裹門扉 以嚴備禦 從之[『성종실록』 20년 3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