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역사적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성(城)을 가리키기도 한다. 급히 방어시설을 만들거나 임시로 성을 만들 경우, 또한 대량의 노동력을 구할 수 없는 변방이나 도서(島嶼) 지방에서 사용하였다. 한국의 성곽은 토성(土城)·석성(石城)이 흔히 알려져 있으나, 목책으로 울타리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목책 관련 유적은 부여 송국리 유적을 비롯한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부터 확인되고 있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삼한(三韓)의 진한(辰韓)에도 성책(城柵)이 있다고 하였고, 『삼국사기』에도 고구려·백제·신라에서 모두 목책을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대 시기에는 목책 관련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은 알기 어렵다.
고려시대 역시 목책에 관한 사료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비해, 『조선왕조실록』에는 목책에 관한 많은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목책을 보면 동해안 2개, 남해안 6개, 서해안 1개, 두만강 연변 21개, 압록강 연변 33개, 내지(內地) 6개로 모두 69개이다. 이 목책들이 만들어진 시기를 보면 15세기가 59개, 16세기 8개, 17세기 2개로 15세기가 전체의 86%를 차지하고, 이 중에서 세종대가 36개로 전체의 52%나 차지한다. 이는 세종대에 4군 6진 설치라는 영토 확장이 강력히 추진되면서 변진(邊鎭)의 설치가 본격화되었는데, 이에 따라 자연히 목책의 설치가 많아졌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