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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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전(明政殿)

서지사항
항목명명정전(明政殿)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정전(正殿), 창경궁(昌慶宮)
관련어궁궐(宮闕), 동궐(東闕), 명정문(明政門), 상례(喪禮), 의례(儀禮), 창덕궁(昌德宮), 편전(便殿)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창경궁의 정전.

[개설]
1483년(성종 14)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창경궁이 조성되면서 창경궁의 정전으로 건립되었다[『성종실록』 15년 2월 22일]. 성종이 즉위할 당시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예종비 안순왕후(安順王后), 덕종비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현존하여 그들의 거처를 마련하고자 창경궁을 지었다. 내전으로 경춘전·통명전·환경전·인양전(仁陽殿)을 짓고 별당으로 양화당(養和堂)·여휘당(麗輝堂)을 지었으며, 궁궐의 정전으로 명정전을 짓고 편전으로 문정전을 지었다.

성종은 창경궁에서 대비전을 위한 연회를 자주 베풀었는데, 내명부를 모시고 잔치를 벌일 때는 인양전을 주로 이용하였다. 대외적으로 종친과 신료들을 위한 연회를 열거나, 대비전을 위한 진연을 맡아서 진행해 준 관원들을 치하하기 위한 연회는 주로 명정전에서 열렸다. 이러한 사용 경향은 연산군대까지 이어졌다.

중종 연간에는 문과 제술 시험을 왕이 친히 행하는 사례가 생겨나면서 좀 더 궁궐의 정전으로의 기능이 확대되었다. 왕에게 백관이 하례를 올리고, 즉위와 책봉례 등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숙종 연간에 창경궁에서 주로 상장례를 행함에 따라 명정전은 발인(發靷)과 반우(返虞)를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 창경궁의 편전으로 조성된 문정전이 혼전 의례를 위한 전각으로 인식됨에 따라 명정전에서 대신 편전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용도의 변화는 각 시기별로 나타난다.

[위치 및 용도]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각 시기별 창경궁이 활용되는 성향에 따라 명정전의 용도에도 변화가 있었다. 1483년(성종 14)에 조성되어 연산군 재위 기간까지 주로 대비전을 위한 연회와 관련하여 잔치를 베푸는 장소로 사용되었다[『성종실록』 17년 11월 18일]. 명정전에서 첫 번째 열린 연회는 세종을 부묘한 뒤 헌관과 집사들에게 베푼 연회였다. 동지(冬至)와 설날에는 대비전을 모시고 내전에서 연회를 벌였고, 명정전에서는 군신들이 참여하여 회례연을 행하였다. 1486년(성종 17)에는 동지를 기념하여 대비전에 잔치를 올리고 종친과 재상을 위해 명정전 뜰에서 잔치를 벌였다. 1487년(성종 18) 1월 1일에는 창경궁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대비전에게 하례하고 표리(表裏)를 올렸다[『성종실록』 18년 1월 1일]. 또한 1489년(성종 20)에는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경복궁에서 창경궁으로 환어하였는데 이때 뒤따른 종친과 재상 및 여러 관원들을 모아 상을 내리고 명정전에서 술을 내렸다[『성종실록』 20년 5월 2일].

당시 대비전이 참여하는 내연은 인양전에서 열렸는데, 인양전은 지금의 함인정(涵仁亭)의 자리로 명정전의 뒤편에 가까이 있었다. 이러한 위치 관계로 인양전에서 내연이 열릴 때 대내(大內)에 들어가지 못하는 종친과 재상 및 백관을 위한 연회는 명정전에서 거행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인수대비에게 휘호(徽號)를 ‘자숙(慈淑)’이라 올리고, 인혜(仁惠) 왕대비에게 ‘명의(明懿)’라 올리면서 왕이 친히 보책(寶冊)과 전문(箋文)을 올린 후, 명정전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연산군도 성종과 마찬가지로 설날이 되면 명정전에서 망궐례를 행하고 대비전께 하례를 올렸으며, 동지에 연회를 열었다. 1527년(중종 22)과 1528년(중종 23) 12월 말에도 동지섣달에 명정전에서 나례를 관람하였다[『중종실록』 22년 12월 30일][『중종실록』 23년 12월 29일].

중종 이후에는 점차 궁궐의 정전으로써의 기능이 확대되었다. 1538년(중종 33)에 명정전에서 제술 시험이 있었다[『중종실록』 33년 4월 22일]. 1543년(중종 38)에는 양로연을 행하였고, 1544년(중종 39)에는 유생들을 시험하였으며, 세자가 『강목(綱目)』을 다 읽었다고 하여 서연관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중종대 명정전에서 문과 제술 시험을 보았던 것처럼 1553년(명종 8)과 1564년(명종 19)에도 문신과 유생들을 명정전에서 국왕이 직접 시험 보아 뽑았다[『명종실록』 8년 8월 26일]. 또 중종이 창경궁에서 승하하자 왕세자였던 인종이 명정전에서 즉위하여 하례를 받았다. 1561년(명종 16)에는 세자빈 책봉례를 명정전에서 거행하고, 왕세자의 초계례(醮戒禮)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인조 연간에는 왕실 내부의 행사만이 아니라 외교 의례까지 거행하였다. 1633년(인조 11)에 금나라 사신을 접견하고, 중국 황제에게 표문을 보내기 위한 배표례(拜表禮)를 행하였다. 1638년(인조 16)에는 장렬왕후를 계비로 맞으면서 명정전에서 납채례(納采禮)와 납징례(納徵禮)를 거행하고 왕비로 책봉하는 의례도 행하였다. 1645년(인조 23)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의례가 거행되었다.

대비전에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장렬왕후(莊烈王后)가 통명전에 거처하고 있다 하여 대비전에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명정전에서 거행하고 백관이 명정전 뜰에서 하례를 올렸다. 1686년(숙종 12)에는 장렬왕후에게 존호를 ‘강인(康仁)’이라 더해 올리고 명정전에서 하례를 받았다.

17세기에 이르면 창경궁은 독립된 궁궐이라기보다는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는 전체 영역으로 활용되어 창덕궁의 보조적 역할로 상장례의 기능이 더 확대된다. 조선전기에 경복궁과 함께 창덕궁을 활용할 당시는 창덕궁의 선정전에서 빈전과 혼전 의례를 행하더라도 경복궁의 사정전이 있으므로 정사를 행할 장소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재건되지 않고 창덕궁을 법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창덕궁의 편전에서 상장례 의례를 행할 경우 궁궐의 기능이 마비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의 전각을 활용하는 사례가 종종 나타났다. 특히 창경궁의 문정전은 혼전으로 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649년(인조 27) 인조의 혼전이 문정전에 설치되자 인조의 재궁(齋宮)을 장릉(張陵)에 장사 지내고 우주(虞主)를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통해 명정전 앞뜰을 거쳐 문정전에 안치했다.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현종의 혼전에 신주를 모셔 올 때[返虞]에도 명정전을 통해 들어왔다. 1688년(숙종 14)에는 장렬왕후의 빈전이 환경전에 설치되어 발인할 때, 환경전에서 빈양문을 통해 명정전에 들렀다가 곡의(哭儀)를 행하고 명정문을 통해 나가 홍화문에서 대여(大輿)에 올라 산릉으로 출발하였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仁顯王后)의 국상에서도 이와 같이 행하였다. 인현왕후는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는데, 영의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명정전 뜰에서 거애(擧哀)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장렬왕후 국상에서와 같이 빈전을 환경전에 설치하여 발인할 때 명정전을 거쳐 산릉으로 나아갔다. 1721년(경종 1)에는 숙종이 승하하자, 청나라에서 황제의 조칙을 받고 온 사신이 명정전에서 조례를 행하였다.

문정전에서 혼전 의례가 행해지고 있을 때에는 명정전에서 대규모 행사를 하면 소란스럽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숙종 연간에 1674년(숙종 즉위) 경사전(敬思殿), 1675년(숙종 1) 효경전(孝敬殿), 1680년(숙종 6) 영소전(永昭殿), 1683년(숙종 9) 영모전(永慕殿), 1688년(숙종 14) 효사전(孝思殿)이 줄이어 설치되면서 명정전은 정전으로 사용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1730년(영조 6)에 선의왕후(宣懿王后)의 혼전이 설치된 이후 1757년(영조 33)까지 문정전에 혼전 사용이 뜸해지자 다시 명정전에서 문신의 제술 시험이 이루어졌다. 백관의 하례도 받았으며 1751년(영조 27)에는 원손을 왕세손으로 책봉하는 의례도 행했다. 또 영조 연간에는 종묘와 각 산릉에 쓸 향(香)을 전하는 의식이 명정전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정조는 창경궁에 편전이 없으니 전례에 따라 편전에서 행하는 도목정을 명정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성종 연간에는 창경궁의 편전으로 조성된 문정전이 자주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창경궁의 편전 기능까지 명정전에서 수용하게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에는 정조가 승하하자 빈전을 환경전에 설치하게 되는데, 이를 전례로 1878년(고종 15) 철인왕후(哲仁王后)의 국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빈전 의례는 환경전에서 설행되었다. 그리고 이때 명정전의 뒤편에 위치하는 빈양문을 통해 명정전에 들었다가 월대에서 재궁을 견여(肩輿)에 태워 홍화문으로 나가며 홍화문에서 대여에 올려 산릉으로 출발하면서, 명정전은 발인의 주된 장소가 되었다.

[변천 및 현황]
1483년(성종 14)에 조성한 명정전은 임진왜란으로 창경궁이 소실될 때 사라지고, 1616년(광해군 8)에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지어졌다. 그 후 창경궁에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으나 모두 내전에서 일어나 명정전은 살아남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명정전과 명정문, 홍화문은 모두 1616년에 조성된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어 궁궐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높게 평가된다.

[형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구조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다포형 가구 구조를 갖는다. 기단은 2중의 월대를 갖추고 있다. 명정전의 남쪽에 위치한 편전인 문정전과는 건복문을 사이에 두고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명정전 후면에는 빈양문으로 이어지는 복도각이 조성되어 있다.



■ [집필자] 신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