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북관개시는 함경도의 회령과 경원에서 열린 시장으로, 만주 지역 여진인의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서 1638년(인조 16)에 시작되었다. 영고탑(寧古塔) 여진인은 회령에서, 고이객인(庫爾喀人)은 경원에서 교역하기로 했는데, 회령개시는 1년에 1번, 경원개시는 2년에 1번 개설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에 회령개시만 열리는 해는 단개시(單開市), 경원개시가 함께 열리는 해를 쌍개시(雙開市)라 하였다.
북관개시에서는 공시(公市), 사시(私市), 마시(馬市) 세 종류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공시는 조선과 청 관원의 감독하에 정해진 물품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주로 농우, 농기구, 소금, 솥 등을 제공하였다. 사시와 마시는 공시가 끝난 뒤, 양국의 사상(私商)들에게 허용된 교역이었다. 양국의 관원은 금지 품목을 제외하고는 교역 물종이나 수량에 간섭하지 않았다. 마시는 조선의 우마와 청마를 교역하던 가축시장으로 청인들이 귀환하기 전 1~2일 동안 열렸다. 마시에서 조선은 어승마(御乘馬)와 전마(戰馬)로 사용할 청마를 구입하였으며, 청은 조선의 농우와 북마(北馬)를 구입하였다. 북마는 과하마(果下馬)로 많은 짐을 지고 멀리 갈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말이었다.
[내용 및 변천]
마시가 열린 초기에는 청마와 북마 혹은 조선 농우의 교환 비율이 조선에 지나치게 불리하여 문제가 되었다. 또한 청에서는 청마의 대가로 조선의 북마를 요구하는 일이 많았는데 특히 암말을 원하여 조선말의 증식을 저해할 우려가 높았다. 그러나 17세기 조선과 청의 외교관계 안정화와 조선과 만주의 경제적 상황이 변동하면서, 마시는 북관개시 가운데 가장 번성하였다. 이는 조선 측의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다. 즉 국내산 말의 수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어승마를 비롯해 전마와 역마 등에서 청마의 수요가 증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청마 수입 허용 여부는 치폐를 거듭하였다. 그 이유는 청이 청마를 판매하는 대신 조선의 농우뿐만 아니라 북마를 요구하면서 청마와 북마의 교환비율이 조선에게 크게 불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초부터는 마시교역이 청마와 조선의 소를 교환하는 우마교역의 형태로 전개되었고, 만주 지역의 말 생산이 크게 늘어 청마의 가격도 안정되었다. 1793년(정조 17)에는 청마가 전국에서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었다.
[의의]
마시는 18세기 이후 청의 강압적인 요구, 공시로 인한 손실, 개시 운영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극복하고 함경도 경제활동에 발전적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북관개시는 함경도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 지역경제를 넘어 국내 상업 부분과 연계됨으로써 조선 경제의 발전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