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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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평관(東平館)

서지사항
항목명동평관(東平館)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예빈시(禮賓寺), 객사(客舍)
관련어교린(交隣), 서평관(西平館), 북평관(北平館), 인수부(仁壽府), 인순부(仁順府), 일본(日本), 유구국(琉球國)
분야정치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전기 일본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던 건물.

[개설]
조선전기에 일본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곳으로 동평관과 서평관을 운영하였으나 후에 동평관으로 통합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이후로는 운영하지 않았다.

[위치 및 용도]
한양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던 건물로, 일본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었다. 세종대에는 일본 사신 이외에도 유구 사신도 머물게 하였다.

[변천 및 현황]
『경국대전』 「예전」 시사객(侍使客) 조에는 외국에서 보낸 사신 접대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었다. 이 가운데 일본에서 보낸 사신에 대하여 “수도에 도착하는 날에는 예빈시(禮賓寺)에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사례하는 날에는 왕이 대궐 안에다 연회를 차려 주며, 또 본조에다 연회를 차려 준다. 왜인과 야인이 왕래할 때에는 여염집에서 자지 못하게 한다. 만일 고을들과 역참들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들락날락하면서 방종하게 구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들을 인솔하는 사람에게 형장 80대를 친다.”고 하였다. 조선초에 일본과의 교류가 진행된 것은 교린(交隣) 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이것은 고려말부터 해안가에 침입하는 왜구를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회유책이었다.

한양에 이들을 위한 숙소로 건립한 것이 동평관과 서평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먼저 이들이 등장하는 것은 태종대였다. 태종대에는 외척인 민무구·민무질의 옥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이들을 각각 강원도와 풍해도로 귀향 보냈고, 이들의 집을 헐어 그 재목으로 동평관과 서평관을 지었다[『태종실록』 9년 2월 26일].

세종대에는 예조에서 일본 왕이 보낸 객인(客人)을 세 곳에 나누어 동평관은 예빈시에서, 서평관은 인수부(仁壽府)에서, 묵사(墨寺)는 인순부(仁順府)에서 담당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5년 12월 20일]. 이렇게 여러 곳에 왜관이 운영되면서 이들이 자주 왕래하고 근처 사람들과 밀무역을 행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세종은 왜관의 제도를 고쳐 동평관과 서평관을 합하도록 하였다. 동평관 남쪽에다 몇 개의 관을 더 건립해서 한곳에서 이들을 관리하도록 하였고, 각각 동평관 1소·2소로 불렀다[『세종실록』 20년 3월 8일]. 또 왜관에 관원을 두고 이들을 관리할 수 있도록 상설아문을 만들어 동평관감호관(東平館監護官)을 두었다. 감호관으로는 시임(時任)과 산직(散職)으로서 3품 이하와 6품 이상인 자를 대상으로 3명을 두었는데, 3명 중 1명은 의금부 관원으로 정하였다[『세종실록』 20년 2월 29일]. 의금부의 관원을 포함하도록 한 것은 그만큼 규찰에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설아문은 5품아문의 예에 따라 운영되었다.

동평관을 한곳에만 운영하면서 왜인의 관리 체계를 강화하였지만 이들에 의한 밀무역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들이 주로 일본에서 가지고 온 물건은 은(銀)과 철(鐵)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이 가져온 물건을 공무(公貿)를 통해 면포로 교환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온 양이 너무 많아 중종대에는 ‘은과 철은 나라에 쓸 긴요한 물건이 아니니 공무할 필요가 없다. 다만 너희들이 가져오는 상물에는 은과 철이 매우 많으니 일체 공무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반드시 실망할 것이므로 지금 1/3을 우선 공무하게 한다. 이 뒤로는 동(銅)·납(鑞)·철(鐵)·연철(鉛鐵) 외에는 절대로 가져오지 말라.’ 하고 지시하였다[『중종실록』 33년 10월 29일]. 그러나 공무 외에 사무(私貿)가 흔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무를 금지하기도 하였지만 쉽게 근절하지는 못하였다. 동평관의 방지기[房守], 고지기[庫直]는 왜인들과 쉽게 친해지기 쉬운 위치에 있는 자리로서 밀무역에 의한 이득을 취하기 쉬운 자리였다. 따라서 이곳에는 각 관사의 노비들을 순서대로 정해서 보내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쉽게 지켜지지 않았는지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관련한 기사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조선전기에 걸쳐 운영되던 동평관은 임진왜란과 더불어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에는 운영되지 않았다. 광해군대에는 이미 사라진 동평관의 옛터에 거민(居民)들을 들어가 살게 한 기록이 있었다.

조선전기에는 동평관과 더불어 북평관도 운영되었다. 북평관 역시 교린의 목적으로 야인들이 한양에서 거처할 수 있는 숙소로 건립되었다. 북평관은 동부 흥성방(興盛坊)에 있었는데 동부학당(東部學堂)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며, 관제는 동평관과 동일하게 운영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443년(세종 25) 일본인 다라사야문(多羅沙也文)이 동평관에 우접(寓接)하고 있었는데, 어두운 때를 이용해서 함부로 관문(館門)을 나가므로 문지기가 이를 금지하였더니 손으로 때려서 상처를 입히는 일이 있었다[『세종실록』 25년 6월 11일]. 그리고 1445년에는 동평관에서 대내전(大內殿)이 사신으로 보낸 화지라다라(和知羅多羅)와 망고시라(望古時羅) 등이 담을 넘어 나가려 하자 감호관(監護官) 손계조(孫繼租)가 잡아 힐문하니, 표아시라(表阿時羅)가 막대기를 가지고 손계조의 옷깃을 잡고 욕보여서 의금부에 가두었다[『세종실록』 27년 4월 7일]. 당시 향화인(向化人) 표사온(表思溫)이 화지라다라를 그의 집으로 불러서 양녀(良女) 부귀(富貴)를 소개하여 간통하게 하고, 또 일본인이 가진 금을 몰래 은으로 바꾸어 주었는데, 이때 일이 발각되어 함께 옥에 가두어 국문(鞫問)하였다. 동평관에서 일본 사신의 무단출입은 경제적인 문제에서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임진왜란 이전에도 삼포왜란 이후로 일본인의 상경은 물론 동평관의 일본인을 처형하기도 하여 동평관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가 좋았을 때는 외교적 순기능을 발휘하였는데, 1494년 성종이 서거하였을 때는 동평관의 일본인들이 서로 울며 “성군(聖君)이 돌아가신 때에 어찌하여 마침 우리가 왔는가.”라면서 슬퍼하였다고 한다[『연산군일기』 즉위년 12월 28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집필자] 이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