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고려말의 원수나 도순문사 등의 장수 휘하에는 보통 도진무(都鎭撫)의 직책을 담당하는 자가 배치되었다. 도진무는 제반 군사 업무를 총괄하여 장수를 보좌했다. 1389년(고려 공양왕 1) 도순문사가 도절제사(都節制使)로 개칭된 이후에는 도절제사 휘하에도 도진무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같은 직책의 도진무라 하더라도 양계(兩界)를 책임졌던 도절제사의 도진무는 정3품 상호군 이상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에 북방 지역을 중요시했던 상황이 반영된 조치였다. 남방 지역은 조선 세조의 재위기에 와서야 전직 관료 중 무재가 있는 자를 뽑아 임명하도록 조치했다. 이 같은 차이 때문에 양계 도절제사의 도진무에게만 녹봉이 지급되었다.
[담당 직무]
도진무는 소속된 장수의 막료로서 군사 회의에 참여했고, 군령을 전달하는 업무 등을 담당했다. 아울러 제반 군사 업무를 총괄하여 장수를 보필했다. 조선초기에는 북방 지역과 관련된 군사 업무가 계속 중요시됨에 따라 도진무의 역할 역시 증대되었다. 북방 지역의 군사 업무를 총괄했던 도절제사의 밑에서 군정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주진(主鎭)을 이루는 병영(兵營)의 2인자로서 도절제사 부재 시 도내의 군사 업무 전반을 담당했다. 아울러 수시로 여러 읍(邑)을 순행하면서 군사 방어 체제 및 훈련 상황, 지방군의 배치와 군기(軍器)의 정비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또 도절제사의 군령 전달과 군량(軍糧)과 군자(軍資)의 관리를 담당했다.
세종대에는 도절제사의 임무가 한 지방을 완전히 책임지는 막중한 것으로서 모든 군사 업무를 총괄해야 하므로 갑자기 제수할 수는 없다며, 먼저 도진무에 임명하여 모든 군사 업무를 익혀 관련 경험을 쌓은 뒤 임명하기도 했다.
[변천]
1389년 도순문사가 도절제사로 개칭된 이후 도절제사 밑에도 도진무가 설치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도 도진무의 직제는 유지되었다. 태종과 세종의 재위기를 거치면서 북방 지역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됨에 따라 관련된 군무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되기 시작했다. 1466년(세조 12) 병마우후로 개칭되었다. 이후 병우후(兵虞候)로 약칭되거나 아장(亞將)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