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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후기에 외방 각 도에 정기적으로 파견하던 군사 책임자. 조선초기에 동계(東界)·서계(西界) 지방에 설치되어 민사(民事), 간혹 군사(軍事)를 관장하던 장관직.
[개설]
도순문사(都巡問使)는 본래 고려후기에 지방의 군사 관련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하였던 순문사(巡問使)에서 기원한다. 1281년(고려 충렬왕 7)에 도순문사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파견되었는데, 초창기에는 임시적인 사행(使行)에 머물렀다. 충정왕 때 왜구의 침입이 격화되면서 점차로 방어에 주력하는 국방 책임자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우왕 때 원수(元帥)직을 겸하면서 도내의 최고 군사 책임자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적당한 사람을 구전(口傳)으로 임명하는 직책에 머물러 강력한 통솔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389년에는 도절제사가 도순문사를 대신하여 군사를 전담하게 했다. 그러나 1392년(고려 공양왕 4) 동계와 서계의 군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도절제사를 도순문사로 환원시켰다. 이 명칭이 조선으로 계승되어 1417년(태종 17)에 8도의 장관명을 도관찰출척사겸감창등사(都觀察黜陟使兼監倉等事)로 통일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담당 직무]
고려후기에 도순문사가 지방으로 처음 파견되었던 것은 충렬왕 때였다. 이 시절에는 주로 임시로 보냈는데, 그때그때 필요한 군사적 조치를 수행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일본 정벌 계획에 따른 군량·전함의 조달, 군인의 징발 따위가 그것이다. 1350년(고려 충정왕 2)에 이르러 왜구의 침입이 격화되자 이후에는 그들을 방어하는 국방 책임자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특히 남쪽 지방의 경우 연해 지역의 수령까지도 왜구를 방어하는 일에 종사하게 했는데, 도순문사는 이들을 통해서 지방군을 지휘하였다. 그렇지만 도내의 군사 업무를 전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도순문사 외에 도지휘사(都指揮使) 등이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우왕 때부터는 도순문사가 원수직을 겸하면서 도내 군사를 지휘하여 방어 임무에 종사하는 최고 군사 책임자로서의 성격이 보다 강해졌다. 즉 이전보다 큰 권위를 가지고 국방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왜구가 연해 지역을 계속해서 침공하였는데, 이들을 막기 위해서는 지방의 방위력을 증강시켜야 하므로 도순문사를 통한 도 단위의 군사 운용이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을 순행하는 종래의 임무는 거의 사라지고 군사적 임무만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중심으로 도순문사영(都巡問使營)이 세워지고 요새화되었다. 군영을 보호하기 위한 성곽 시설도 갖추고 필요에 따라서는 주변에 해자(垓字)도 조성하였다. 군량을 저장하는 창고도 두었다. 이들을 관리하는 인원도 배치되었으며 이 역시 도순문사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또한 도순문사는 한 도의 군사 책임을 맡으면서 군령(軍令)과 군정(軍政)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실무자들이 배속되는 기구도 만들어졌다.
도순문사는 여전히 경관(京官) 중에서 합당한 사람을 구전으로 임명해서 보내는 직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주하면서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가 아니어서 여전히 도내를 순시하면서 군사 업무를 감독하는 역할을 했을 뿐 강력한 통솔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마침내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도절제사로 대체하여 군사를 전담하는 직위로 승격시켰다.
1392년에는 동계와 서계의 경우 도절제사를 도순문사로 환원시켰고 이는 조선 태종 때까지 계속되었다. 북쪽은 남쪽 지역과 달리 군사적인 기능이 우선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도순문사는 군사직을 주 임무로 하면서 행정 장관으로서의 기능까지 담당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때때로 군사를 전담하는 도절제사가 별도로 파견되기도 했으나[『태종실록』 7년 8월 16일], 대체로 도순문사가 두 기능을 겸하였다. 그로 인해 남쪽 지방의 관찰사와는 약간 구별되기도 했다. 군대를 이끌고 적을 공격하기도 하며[『태조실록』 2년 3월 29일], 군적(軍籍)을 작성하여 바치기도 했다[『태조실록』 2년 7월 2일].
한편 능실(陵室)에 제사를 지내거나[『태조실록』 1년 12월 1일], 효자·순손(順孫)·절부(節婦)를 찾아서 보고하여 복호(復戶) 등을 받게 하기도 했다[『태조실록』 4년 12월 12일]. 도내 군현에 대한 통폐합을 건의하여 실현시키는 등의 일반적인 관찰사 업무도 실행하였다.
겸목법(兼牧法)이라고 해서 도순문사가 관내의 부(府)나 목(牧) 등의 행정 책임자가 되어 직접 다스리기도 했다. 서북면도순문사는 평양부윤(平壤府尹)을 겸했고[『정종실록』 2년 4월 18일], 동북면도순문사는 영흥부윤(永興府尹)을 겸하기도 했다[『태종실록』 13년 7월 19일].
[변천]
도순문사는 고려후기에 설치되어 파견되기 시작했다. 1227년(고려 고종 14)에는 도순문사의 전신이라고 할 순문사가 지방에 파견되었다. 1281년(고려 충렬왕 7) 도순문사가 처음 파견된 이후 1350년(고려 충정왕 2)에 왜구가 본격적으로 침입할 때까지 임시적인 사행(使行)으로 파견되어 여러 군사적인 사신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직접 방어하는 일에도 나섰다. 그런데 왜구의 침입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이들을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보내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이때 그에 제수된 자의 관품이 2품관 이상이면 도순문사라 칭하였고, 3품 이하이면 순문사라 칭하였다.
공민왕대 들어와 충청도·전라도·경상도와 동계·서계에 정기적으로 도순문사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곧 도순문사는 도별 국방 책임자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 하부 조직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관내 수령과 지휘자들 사이의 관계도 체계화되지 못하여 실질적인 군사 업무 처리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왜구 방어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거의 매년 파견되어 군사의 징발이나 군수물자의 조달 등에 힘썼다.
우왕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도순문사가 항상 원수를 겸하게 되었다. 본래는 ‘군대를 일으킬 때마다’라는 단서가 있었으나 당시 상황에서는 무의미하였다. 그런데도 외침이 줄지 않고 격화되자 본래 민사를 맡았던 안찰사(按察使)나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까지도 때때로 군대를 거느리고 출동하게 했다. 한편 하나의 도에는 원수 1명을 파견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어떤 때에는 4·5명, 심지어 9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군사 지휘 계통이 통일되지 않아 많은 폐해가 발생하였기에 창왕이 즉위한 뒤에는 도별 군사 업무를 도순문사에게로 일원화시켰다.
1389년에는 도순문사에게 강력한 지위를 보장해서 군사를 전담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도순문사를 도절제사로 개칭하고 그 하부 기구로 경력(經歷)과 도사(都事)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1392년 동계·서계는 북방의 방위를 책임지는 곳이라 하여 1392년에 도순문사로 환원되었다. 이는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1413년(태종 13) 동계·서계의 명칭이 동북면·서북면에서 영길도(永吉道)·평안도(平安道)로 개칭되는 등 전국에 걸쳐 일률적으로 도제(道制)가 정비되었다. 그러다가 1417년 10월에 8도 장관의 명칭을 통일시키는 조치에 따라 남도와 같이 도순문사가 도관찰출척사겸감창등사로 개칭되면서 소멸되었다[『태종실록』 17년 10월 15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민현구, 『조선 초기의 군사 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육군사관학교 한국 군사 연구실 편, 『한국 군제사(軍制史): 근세 조선 전기편』, 육군본부, 1968.
■ 최정환, 『역주 『고려사』 백관지』, 경인문화사, 2006.
■ 오종록, 「조선 초기 병마절도사제의 성립과 운용(상)」, 『진단학보』 59, 1985.
■ 오종록, 「고려 말의 도순문사(都巡問使): 하삼도(下三道)의 도순문사를 중심으로」, 『진단학보』 62, 1986.
■ 오종록, 「조선 초기 양계(兩界)의 군사 제도와 국방 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장병인, 「조선 초기의 관찰사」, 『한국사론』 4,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