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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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복(大禮服)

서지사항
항목명대례복(大禮服)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갑오의제개혁(甲午衣制改革), 문관복장규칙(文官服裝規則), 외교관(外交官), 원수부(元帥府), 흑단령(黑團領)
분야생활 풍속
유형의복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기에 문무관이 진하(陳賀)나 알현(謁見), 외교 관계의 행사 때에 입었던 예복.

[개설]
대례복은 문관과 무관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조복(朝服)이자, 국왕에게 축하를 올리는 진하, 국왕을 찾아가 뵙는 알현 등의 공식 행사에 입는 복식으로, 1895년(고종 32) 갑오의제개혁(甲午衣制改革) 이후에 제정되었으며 1900년(광무 4)에 문관복장규칙이 반포되면서 서구식 대례복도 제정되었다. 서구식 대례복에는 국가 상징 문양의 하나인 무궁화 문양을 수놓았다. 대례복을 서구식 양복 형식으로 개정한 것은 특히 외교관계 시 서구나 일본과 같은 형식을 취함으로써 근대화된 면모를 보이고자 한 것이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는 가례(嘉禮)·길례(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의 오례(五禮)에 따라 제복(祭服)·조복(朝服)·공복(公服)·상복(常服)을 착용했는데, 1895년 8월 10일 대례복·소례복·상복을 제정 반포한 뒤에는 대례·소례에 따라 대례복·소례복을 입었다. 대례복은 흑단령(黑團領)·사모(紗帽)·품대(品帶)·화자(靴子)로 하여 국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동가(動駕)·국가 기념일인 경절(慶節)·문안(問安)·예접(禮接) 때에 착용하며, 소례복은 진현(進見) 때 또는 대례 때에도 착용하도록 간소화했다[『고종실록』 32년 8월 10일].

1900년 4월 17일 칙령 제14호 문관복장규칙(文官服裝規則)과 칙령 제15호 문관대례복제식(文官大禮服制式)을 반포함으로써 서구식 관복제도를 도입하였다[『고종실록』 37년 4월 17일]. 이는 서구식 궁중 예복을 모방한 일본의 대례복을 참작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대례복과 서구식 대례복 제도가 공존하게 되었다. 이는 1895년에 반포한 무관의 서구식 복장 착용에 이어 문관의 복장도 서구식으로 바꾼 것이었다.

서구식 문관 대례복은 외국의 규정을 참작하여 도입하였으며 외교관부터 먼저 착용하도록 하였다. 1900년 원수부(元帥府) 관제를 제정하고 황제가 대원수(大元帥), 황태자가 원수(元帥)가 되자 황제와 황태자도 서구식 양복 형식의 군복을 착용하였다. 황제의 대례복은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황제복식인 황포(黃袍)와 더불어 서구식 양복도 대례복의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서구식 양복인 군복형 대례복은 군대와 관련된 의례에서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1904년(광무 8)에서 1906년(광무 10)에 걸쳐 문관복장규칙과 문관복장제식을 개정하였으며 1906년 2월 27일 궁내부 본부 및 예식원 예복 규칙을 새로이 제정하였다. 1906년 12월 12일에는 다시 칙령 제75호로 문관대례복제식을 개정하였다[『고종실록』43년 12월 12일]. 이때의 개정으로 상의 전면의 무궁화를 간소화하도록 하였다.

[형태]
서구식 문관 대례복은 대례모(大禮帽)와 연미복(燕尾服) 모양의 양복 상의와 조끼, 바지, 검(劍)으로 구성된다. 모자는 가운데가 불룩 솟은 산형(山形)으로 검은색 벨벳에 장식 털을 붙이고, 모자의 오른쪽에 무궁화 자수가 수놓인 장식을 붙였다. 상의는 앞섶이 열린 개금형(開衿形) 연미복으로 가장자리에 금선을 두르고 전면, 후면, 옷깃, 소매에 전체적으로 당초문을 수놓은 사이에 무궁화를 자수로 수놓아 국가의 정체성을 알리는 상징을 도입하였다. 바지는 흑감색으로 좌우 측면에 금선을 붙였다. 검에는 검자루 머리에 무궁화를 조각하고, 장식인 검서(劍緖)를 부착하였다.

고종의 군복형 대례복과 황태자의 군복형 대례복은 투구형 모자와 상의, 하의, 검으로 구성되었다. 상의는 매듭단추로 여미는데 금색 수실로 만든 견장과 황제는 11줄, 황태자는 10줄의 수를 놓은 소매 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바지 옆선에는 옆줄이 있는 형식이다.

[용도]
대례복을 입는 예식은 소례복을 입는 예식과 구분되었다. 대례복은 문안을 드릴 때, 동가동여(動駕動輿)할 때, 공적으로 황제를 알현할 때,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 때 착용하였다. 이에 견주어 소례복은 궁내에 진현할 때, 공식적인 연회에 참석할 때, 상관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할 때, 사적으로 서로 축하하고 위로할 때 착용하도록 하였다.

황제의 전통적인 대례복은 외교관의 알현이나 접견에 착용하였고, 군복형 대례복은 군대와 관련된 의례에 착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대례복은 국내에서는 물론 주로 해외로 파견 나가는 외교관이 많이 착용하였다. 프랑스 주재 공사 이범진(李範晉)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등 주요 국제행사에서 국가를 대표하여 무궁화 자수가 수놓인 대례복을 입고 행사에 참여하였다. 영국, 이태리, 독일 3국의 특명전권공사를 지낸 민철훈(閔哲勳)도 대례복을 입고 외교활동을 벌였다. 유럽에서 활동한 이들의 대례복은 주로 현지의 양복점에 의뢰해서 제작하였다. 일본어 통역관으로 출발하여 부산을 중심으로 외교활동을 벌인 박기종(朴琪淙)은 물론, 프랑스 주재 한국 명예 총영사를 지낸 룰리나(M. Roulina)도 대한제국의 대례복을 입고 활동하였다. 이처럼 대례복은 복식으로서 대한제국을 시각적으로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참고문헌]
■ 『대한예전(大韓禮典)』
■ 『대한제국관보(大韓帝國官報)』
■ 이경미, 『제복의 탄생-대한제국 서구식 문관대례복의 성립과 변천』, 민속원, 2012.
■ 이경미, 「사진에 나타난 대한제국기 황제의 군복형 양복에 대한 연구」, 『한국문화』50 , 2010.
■ 최규순, 「대한제국기 궁내부 대례복 연구」, 『정신문화연구』Vol.31 No.2, 2008.

■ [집필자] 목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