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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후기 이래 권세가들이 사적(私的)으로 차지한 대토지, 또는 대토지를 바탕으로 채택하고 있던 특별한 농업경영방식.
[개설]
농장(農莊)의 기본적인 의미는 고려 말 이후에는 대토지소유자가 소유한 토지를 말했다. 농장은 또한 권세가들이 차지한 대토지에 적용한 농업경영방식을 의미한다. 권세가들은 개간(開墾), 매득(買得) 등 합법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토지 탈점(奪占)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대토지 즉 농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토지로 구성된 농장을 경영하는 방식도 예속노동력을 동원하는 경우와 일반 소작인에게 소작지로 나누어주는 방식 등을 적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권세가의 농장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은 노비(奴婢), 처간(處干), 양인 등 다양하였다. 또한 농장 주인과 소작인은 농업생산으로 획득한 소출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누었다.
[내용 및 특징]
농장이 등장하는 것은 고려후기부터이다. 신라시대에도 귀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식읍(食邑) 등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식읍은 농장과 달리 식읍주가 식읍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인신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신라시대에 왕실세력과 귀족들은 대토지 즉 농장을 확보하였는데, 장(莊)이나 처(處)와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12세기에 고려의 토지분급제도인 전시과(田柴科) 체제가 붕괴되면서 농장이 등장하였다. 무신집권 성립 뒤에 등장한 농장은 원 간섭기에 권문세족을 중심으로 더욱 확대 일반화되었다. 권문세족들은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을 침탈(侵奪)하여 농장을 개설하였다. 고려의 권문세족들은 대토지 소유, 즉 농장 소유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확대 유지하려고 하였다. 12세기 이후 대토지 소유자 즉 농장주인이 크게 자리를 잡은 것은 당시 크게 진전된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삼았다. 농업 생산으로 이득을 획득하기 위해 개간, 매득, 또는 불법적인 탈점을 통해 토지를 확대하고 농장을 개설한 것이었다.
고려후기 농장 확대는 약탈(掠奪), 강점(强占), 기진(寄進), 사패(賜牌), 투탁(投托), 고리대, 개간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권문세족이 소유한 농장은 그 경계를 “산과 내로 표시할 정도로 넓었다[標以山川, 跨州包郡]”고 한다. 농장에서 이루어지는 농업경영은 예속 노동력을 동원하는 경우와 일반민에게 소작을 부치는 경우로 나뉘어졌다. 고려말 권문세족들은 일반 양인을 억눌러 처간(處干)으로 삼아 농장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다. 고려말 고종 ·충선왕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을 억제하고 농장을 몰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조정의 재정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농장 확대 과정에서 투탁(投托)은 농민들이 자신의 소유지를 대토지 소유자에게 기탁하고 스스로 자영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한 경우를 가리킨다. 고려후기에 들어서면서 전시과체제가 문란해지고 농장이 형성됨에 따라 관료에게 지급해야할 녹봉마저 지급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점차 이를 자영농들에게 가중할 정도로 부과하여 농민들은 이런 과중한 국가의 전세나 역에 대한 부담을 벗어나고자 권문세족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바치고 스스로 노비로써의 삶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농민의 투탁은 농장의 확대를 가져왔고 다시 또 다른 농민들이 투탁을 하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농장 형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점탈(占奪)이었다. 점탈은 권력을 동원하여 다른 사람의 토지를 강탈하여 자신의 토지에 겸병하는 것이었다. 권세가들이 점탈 대상으로 삼은 토지는 종묘, 학교, 창고 등 국가기관 내지 왕실기관의 토지, 사원의 토지, 녹전, 군자전 등 공전(公田) 뿐만 아니라 5도 및 양계의 민전(民田) 즉 일반 백성이 대대로 경작한 토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권문세족들은 개간(開墾) 과정을 통해서 농장을 마련하였다. 진황지(陳荒地), 즉 진전(陳田)을 개간하여 크지를 크게 축적하였다. 또한 원의 침입 이후 황폐해진 토지의 개간을 촉진하기 위해 국가가 발급한 개간허가증 즉 사패(賜牌)를 통해 농민이 개간한 땅을 점탈하기도 하였다.
사원도 농장을 개설하였는데 사원전이 곧 농장이 된 것이었다. 사원전은 국가에서 전시과에 따라 분급해준 전지와 함께 왕이 사찰에 토지를 지급하는 시납 형태로 일종의 기증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그런데 사원은 권문세족의 농장이 확대되는 상황에 발을 맞춰 자신들의 농장을 형성하였다. 사원은 신도들이 신앙심의 발로로 시납(施納)한 전지(田地)로 농장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신도 가운데 사원에 자신의 인신을 투탁하기도 하였다. 고려후기에 민(民)에 대한 과도한 수취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서 다수가 피역처로 사원을 택하는 것으로 자신의 전지를 가지고 사원에 투탁하여 사원의 전호가 되거나 신분적으로 노예 신분이 되는 경우였다.
관리들이 고위 관료들에게 지급하는 일종의 뇌물 형태인 증뢰(贈賂)와 소출을 묘제의 비용으로 대기 위한 묘위토(墓位土)를 확대하는 식으로 사전을 늘려 농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리대로 타인의 민전을 탈점하는 식의 화식(貨殖)이나 민전을 사들이는 매득(買得)의 방식 또한 널리 성행하였다.
농장의 관리는 가신이나 가노들이 관리를 하였으며 왕실이나 정부기관의 농장은 관원들이 관리를 하였다. 또한 원거리에 있는 농장은 장사(莊舍) 혹은 농사(農舍)를 두고 관리하였고 그 관리 책임자를 장주(莊主), 장두(莊頭), 간사노복(幹事奴僕) 등으로 부르며, 농사를 총괄하고 곡물을 운송하는 업무를 맡게 하였다. 농장의 경작은 직영을 하는 경우에는 농장이 거주지와의 거리가 멀지 않을 때 노비를 시켜 경작을 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으며, 농장이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경우에는 주로 소작제로 운영을 하였다. 소작제는 말 그대로 소작을 주고 지대를 수취하는 방식으로 소작민 중에는 신분적으로 노비, 양인들 모두 존재하였다.
토지에 따른 경영형태를 보면 수조지를 겸병해 형성된 농장은 주로 본래 자신들의 경작지였지만 투탁이나 초집된 신분상으로 양인인 처간이나 전호들로 농장주에 의해 예속되어 마치 노비처럼 농장주에게 부림을 당하였다. 더불어 소유지를 경작하는 외거 노비의 경우 농지는 물론 일체의 농경 도구를 소유주가 부담하는 가장 열악한 처지의 소작민이었으며, 노비직영제와 구별하기 힘든 점이 있으나, 영농을 책임지고 수확물의 일부만 농장주에게 납부하는 점에서 비록 신분상으로는 노비지만, 소작민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농장의 토지 중 신분적으로 예속되지 않고 자신의 경리를 가진 차경민이 경작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들의 토지는 수조지 겸병한 경우보다는 개간이나 매입 등으로 확보한 경우가 많았다.
[변천]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는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하여 1391년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하였다. 그런데 과전법은 관료 등에게 토지의 수조권을 나누어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농장의 변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권세가들은 조선초기에도 토지를 크게 넓혀나갔다. 해안의 간석지를 간척하는 방식인 해택(海澤) 개발에 나서 막대한 농지를 확보하였다. 왕실의 외척을 중심으로 한 권세가(權勢家)들이 둔전(屯田)의 명목으로 해택(海澤) 즉 간석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하였다. 그런데 경지로 확보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사유지(私有地)로 변화시키고, 주민을 병작자(竝作者) 즉 소작인으로 흡수하여 농장(農場)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권세가들은 또한 몰락하는 농민의 소유지를 헐값에 매득(買得)하는 방식도 많이 이용되었다. 미개간지를 개간하여 경작지로 만드는 방법은 노비 노동력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을 경우 유력한 방법이었다.
조선초기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의 농업경영은 16세기까지 노비 노동을 이용하는 직영지 경영, 흔히 농장제라고 일컬어지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 지주들은 대토지 농업경영을 농장적인 요소를 띤 노비제적인 경영에서 병작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때 양반지주는 자작지(自作地)에서는 노비의 사역을 통해 구현하는 자작제 경영 형태를 주로 채택하면서도, 일정한 토지를 ‘작개(作介)’라 하여 노비의 책임 경작지로 할당하고 노비의 생계를 위해 별도의 ‘사경(私耕)’을 지급하는 작개와 사경의 경영 형태를 채용하였다. 작개제(作介制)는 양반지주의 직영지 경영이 자작제에서 병작제로 이행하는 도중의 과도적인 성격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양반, 관료들의 토지겸병을 촉진되면서 농장이 확대되었고, 농민들은 농장의 전토 일부를 빌려서 농사를 짓는 병작농(倂作農)으로 전락하였다. 특히 16세기 이후가 되면 왕실에서 내수사(內需司)를 통하여 토지와 노비를 모아들이고 장리사업까지 벌여나갔다. 이를 통해 왕자, 공주, 왕후에게 소속된 궁방전(宮房田)이 확대되었다.
17세기로 들어서면 지주의 직영지 경작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고 병작제를 중심으로 지주제가 전개되었다. 병작제의 확대는 소농민의 토지 상실의 진전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더욱이 상품화폐경제 발달에 따라 사회적 재부의 재분배 과정에서 신분제의 변동과 함께 농업경영·토지소유 등의 측면에서 광범위한 농촌사회의 분화·분해가 나타났다. 농민층 분해의 진전으로 임노동적인 기반 아래 시장성을 고려한 상업적 농업을 영위하는 농민들이 등장하였고, 신분제의 변동의 영향으로 일반 양인, 노비층 가운데 부농, 지주가 성장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의의]
농장은 고려후기 이래 광범위하게 나타난 대토지의 집중과 그에 따라 농업경영을 말한다. 대토지를 집중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변동이 나타났다. 또한 농장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의 처지도 변화하였다. 고려말 권세가들의 탈점으로 형성된 농장은 처간(處干) 노동력을 이용하여 농업경영이 이루어졌다. 15세기에는 대체적으로 자영농민의 농업경영의 활성화되었다가 15세기 중후반부터 관인지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의 토지겸병이 증가하면서 자영농의 위축과 지주적 농장경영이 늘어났다. 이후 16세기에 들어서면 양인층이 감소하고 노비층이 증대하면서 지주의 농업경영도 노비노동에 의존하는 바가 많아졌고, 결국 농장형의 지주가 증대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병작제가 지주의 농업경영으로 채택되고 있었다. 이러한 병작전호는 대부분 양인과 납공노비층에서 충당되었을 것이다. 17세기로 들어서면 지주의 직영지 경작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고 병작제를 중심으로 지주제가 전개되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게 된다.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16세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사회적 재부의 재분배 과정에서 신분제의 변동이 초래되고, 결과적으로 농업경영에서도 일반 양인, 노비층 가운데 부농, 지주로 성장하는 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