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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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별궁(南別宮)

서지사항
항목명남별궁(南別宮)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궁가(宮家), 별궁(別宮)
동의어북관사신소(北關使臣所), 환구단(圜丘檀)
관련어태평관(太平館), 왕실(王室), 사신(使臣), 외교(外交), 의례(儀禮)
분야정치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선조와 후궁 인빈김씨 사이에서 출생한 의안군의 궁가(宮家)이자 왕실의 별궁.

[개설]
남별궁은 선조가 아들 의안군(義安君)을 위하여 지은 궁가(宮家)였다. 의안군이 죽은 뒤 비어 있다가 임진왜란 때부터 임시 관소로 사용하였다[『선조실록』 26년 11월 5일]. 임진왜란 이후 관공서가 대부분 소실된 상황에서 주로 사신이 머물고 접대받는 곳으로 사용되었으며, 사신이 없는 동안에는 다양한 용도의 임시 관소로 활용하였다. 숙종대 이후로는 남별궁 안에 사신 접대 업무를 담당하는 영접도감(迎接都監)이 설치되면서 임시 관소로 사용되지는 않았다[『숙종실록』 1년 3월 3일]. 고종대에는 남별궁 터에 환구단이 설치되면서 원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치 및 용도]
남별궁은 조선시대 행정 구역으로는 한성부 남서(南署) 호현방(好賢坊)에 해당하는, 오늘날 서울시 중구 소공동 87번지 일대의 웨스턴조선호텔이 있는 곳이었다. 남별궁은 왕실의 별궁으로 왕자 의안군에게 맡겨 관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지어졌다. 의안군이 죽은 뒤에는 사신관인 태평관을 대신하여 명과 청에서 오는 사신들이 머무는 북관사신소(北關使臣所)로 사용되었다. 사신들이 오지 않는 기간에는 각종 임시 관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남별궁의 터는 원래 태종대 명과의 통혼을 막기 위하여 서둘러 결혼시킨 경정공주(慶貞公主)의 제택이 있던 가대(家垈)였으나 경정공주가 죽은 뒤 자녀들의 재산 분쟁으로 국가에 환속되었다. 선조는 이곳에 1583년(선조 16) 200여 칸의 별궁을 창건하여 의안군에게 하사하였으나 의안군이 요절하면서 비어 있는 제택이 되었다.

모든 궁궐이 소실된 임진왜란 시기, 선조가 정릉동 행궁에 이어하여 일대의 제택과 민가를 임시 관소로 사용하였다. 이때 행궁과 입지상 가깝고 규모가 있던 남별궁은 망궐례(望闕禮) 등을 행하는 궁궐의 임시 정전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복구되지 않은 태평관을 대신하여 사대국(事大國)의 사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사신이 머물지 않는 기간에는 국정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제 관소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인조 연간에는 인조의 친아버지였던 정원군의 묘인 흥경원을 이장할 때 대여가 머물 곳으로 사용하였으며[『인조실록』 4년 9월 22일], 세자의 친영례(親迎禮)를 행하는 곳으로도 사용하였다. 남별궁에는 『광해군일기』를 수정하기 위한 추숭도감(追崇都監)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효종 연간에도 남별궁은 임시 관소의 역할을 하였다. 1655년(효종 6)에는 각 도에서 올라온 신구안적(新舊案籍)들을 정리하기 위한 넓은 공간으로 남별궁이 선택되기도 하였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지방에 거주하는 중앙 각 관청의 외거노비 중 도망자를 추쇄하는 추쇄도감(推刷都監)이 남별궁에 차려졌다. 1657년에는 병자호란으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인조실록』을 수정하는 수정청(修正廳)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현종 연간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임시 기구를 육조 아문의 관사에 설치하고 그 아문의 기능을 남별궁으로 옮기는 일도 생겼다. 효종 영릉의 천릉도감을 형조의 관사에 차리면서, 사신이 오지 않아 비어 있던 남별궁으로 형조의 업무를 옮긴 것이 그 예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1675년(숙종 즉위년)에도 있었다. 현종의 실록청을 형조에 설치하고 형조의 업무를 남별궁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남별궁의 임시 관소적인 활용은 숙종대 이후 나타나지 않았다. 사신 접대의 모든 일을 담당하는 영접도감이 남별궁에서 설치되어 그곳에서 지속적인 회동을 가졌기 때문이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는 남별궁을 관소로 수리하고, 그곳을 관리하고 담당하는 관원을 두기 위하여 태평관 근처에 있던 예빈시(禮賓寺)를 남별궁 안으로 옮겼다[『정조실록』 즉위년 11월 5일]. 이는 남별궁이 온전히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관소의 기능만을 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을 영건하고 주변의 도로를 정비하던 시점, 남별궁의 자리에는 황제국임을 상징하는 환구단이 설치되었다. 남대문로에서부터 진입하던 남별궁과는 달리 환구단은 남향에 가까운 좌향을 하고, 경운궁에서 남대문로로 연결되는 소공주로에서 진입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소공주로는 이전과는 다른 도시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형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소공동홍고양가도형」·「사대부가배치도형」을 통하여 남별궁의 구체적인 공간 구성과 배치를 확인할 수 있다. 남별궁은 선조대에 별궁으로 영조되었기 때문에 주택과 궁궐의 중간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정청(正廳)으로 사용된 대청 건물의 사면퇴, 궐패(闕牌)를 보관하던 9칸의 사우(祠宇)가 일반 사대부 집에서 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공해 건물이 아닌 별궁을 사신소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의례에 필요한 성격의 공간에 맞추어 기존 건물의 명칭을 바꾸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안채의 대청 건물은 정청으로, 안채를 향하여 들어가는 중문과 길은 정문과 정로로, 연회를 하는 사랑채는 서연청(西宴廳)으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소공동홍고양가도형」
■ 「사대부가배치도형」
■ 정정남, 「임진왜란 이후 남별궁의 공해적 역할과 그 공간 활용: 장서각 소장 『소공동홍고양가도형』·『사대부가배치도형』의 분석을 통하여」, 『건축역사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논문집』 제18권 제4호, 2009.

■ [집필자] 정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