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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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己丑獄事)

서지사항
항목명기축옥사(己丑獄事)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정여립(鄭汝立), 정철(鄭澈), 동서분당(東西分黨), 동인(東人), 서인(西人), 남명학파(南冥學派), 화담학파(花潭學派), 퇴계학파(退溪學派)
분야정치
유형사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589년(선조 22) 정여립 역모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유배를 당한 사건.

[개설]
정여립(鄭汝立) 역모 사건의 당사자인 정여립은 진안의 죽도에서 자결하였다. 정여립이 자결하자 서인은 이 일을 정치적 반대파였던 동인을 공격하는 빌미로 이용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이때 동인 중에서도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피해가 컸다. 특히 남명 조식의 분신으로 평가받았던 최영경(崔永慶)의 옥사(獄死)는 사건의 파장을 확대시켰다. 기축옥사 이후 동인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퇴계학파 중심의 남인과 남명학파 중심의 북인으로 분당되었다.

[역사적 배경]
16세기 이후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다양한 학파들이 생겨났고, 학파를 모집단으로 하는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1575년(선조 8) 동서 분당은 붕당 정치의 시작으로, 선조 중반 이후 동인과 서인의 붕당 간 대립이 치열해졌다. 정여립은 원래 이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나, 이발과 친교를 맺으면서 동인으로 분류되었고, 역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서인은 이러한 점을 들어 동인을 공격하였다. 정여립은 평소에도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하나의 주인이 있겠는가."라는 등의 말을 하며, 군주세습제를 부인하는 발언을 하는 등 주자성리학의 명분론이나 의리론에서 일탈한 소유자였다. 또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천민들과 어울리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여립의 역모를 알리는 보고서는 조정을 충분히 긴장시켰고 조정은 즉시 정여립 체포령을 내렸다.

[발단]
1589년(선조 22) 10월 2일 황해도관찰사 한준이 한 장의 비밀 보고서를 올렸다.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공동으로 작성한 이 보고서는 바로 전라도 전주를 거점으로 한 정여립의 역모 상황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전주와 진안 등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정여립은 사회 체제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을 점차 규합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여러 경로를 통해 그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알고 일거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기축년(1589) 겨울 서남, 즉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일시에 병사를 일으켜 얼어붙은 강을 건너 성을 직접 쳐들어가 무기고를 불사르고 조운 창고를 약탈하며 심복을 도성 요소에 배치한다는 것이 역모의 기본 시나리오였다. 이어 자객을 나누어 보내 대장 신립과 병조 판서를 살해하고 거짓으로 교지를 꾸며 인근의 수령과 병사(兵使), 수사(水使)를 죽이며 언관을 사주하여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파직시키고 그 틈을 타서 일제히 궐기한다는 것이었다.

한준은 급히 조정에 이 문서를 올렸고 삼정승과 여섯 승지가 참여하는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즉시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고 의금부 도사가 황급히 황해도와 전라도에 급파되었다. 이 사실을 이미 알아챈 정여립은 진안의 죽도 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이는 기축옥사의 출발일 뿐이었다. 역모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면서 정여립과 친분이 있거나 편지를 교환한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 동인이었고, 수사 책임을 서인의 강경파 정철(鄭澈)이 맡으면서 옥사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확대되었다.

[경과]
1589년 11월 8일 서인 측의 대표적인 강경파 정치인 정철이 정언신을 대신하여 우의정에 임명되어 위관(委官), 즉 수사 책임을 맡으면서 동인 공격의 선봉에 섰다. 12월 12일에는 전라도 낙안(樂安) 유생 선홍복(宣弘福)이 가혹한 수사를 못이겨 이발·이길·백유양 등이 연루되었음을 자백하였다. 이와 같은 자백에는 정철의 공작이 있었다[『선조실록』 22년 12월 12일].

동인에서 연루자가 많이 생겨나자 서인은 정여립 역모 사건을 정국의 전환을 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다. 1575년 동인과 서인의 분당(分黨)이 일어난 이래 두 당파는 치열하게 대립하였고, 1583년에는 동인인 허봉·박근원·송응개 등이 이이를 몰아내려다 오히려 유배를 당하는 계미삼찬(癸未三竄) 사건이 있었다. 정여립 역모 사건은 계미삼찬에 이어 동인과 서인이 다시 당쟁에 총력을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인들의 동인 공격에는 정철과 함께 송익필이 나섰다. 동인 측 강경파였던 이발·이길과 오래된 원한 관계에 있었던 송익필은 후대에 기축옥사를 기획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당시 정국에서 수세에 몰려있던 서인들은 정여립 사건을 동인 공격에 적극 이용하면서 옥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유성룡과 이발은 같은 동인이었으나 유성룡은 이발을 구제하지 못했으며, 마침내는 곤장을 쳐서 죽게 하였다. 이발뿐 아니라 70세의 어머니, 8살 난 아들, 그리고 아우 이길까지 모두 옥에서 죽었으며, 백유양도 세 아들과 함께 죽었다.

기축옥사로 말미암아 동인의 강경파인 이발·이길 형제가 처형된 것을 비롯하여 유언길, 유종지 등은 모두 곤장을 맞아 죽었고 홍가신·허당·김창일 등 수십 명의 동인 관리가 벼슬을 삭탈당했다. 또한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로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는 자들은 수감됨으로써 정국은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이후에도 남명학파의 핵심 인물인 최영경이 노비 출신으로 민심을 어지럽히다 정여립의 모사꾼이 되었다는 길삼봉이라는 무고를 받아 옥중에서 사망하는 등 사건의 파장은 사림 사회 전체에 휘몰아쳤다. 최영경이 진주의 옥에 갇히자 천여 명의 선비가 옥문 밖에서 그의 무고를 주장하였다. 기축옥사가 다분히 정치적으로 조작된 사건임을 알았던 선비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기축옥사의 파장은 동인 내의 분열로 이어졌다. 동인이라는 한 배를 타고 있던 퇴계학파가 서인들이 주도하는 기축옥사의 대공세에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남명·화담학파의 문인들이 주축이 된 세력들은 퇴계학파에 분노했다. 동인의 일부 급진세력이 관여한 기축옥사는 점차 당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사실 동인 중에서 정여립과 관련을 맺은 인사는 일부 급진 세력이었다. 하지만 서인은 이를 계기로 동인 전체를 공략하고자 하였다. 특히 서인 측 강경파인 정철 등이 앞장을 서서 동인 세력에게 강경한 처벌을 가하였다. 동인 세력 중에는 정여립의 입장에 우호적이었던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피해가 컸다. 남명학파나 화담학파의 입장에서는 자파의 인사들이 엄청나게 당하는데도 수수방관하는 퇴계학파의 세력들에게 더 큰 원망이 갔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의 한 축을 이루었던 남명과 화담학파는 북인으로, 퇴계학파는 남인으로 분당되었다. "기축옥사에서 북인이 많이 죽은 것은 정여립이 북인 계열이었기 때문이다."라는 『연려실기술』의 지적처럼 정여립은 북인으로 파악되었으며, 북인의 모집단을 형성한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는 그만큼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당의통략(黨議通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병주,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 일지사, 2000.
■ 김용덕, 「정여립 연구」, 『한국학보』4, 1976.

■ [집필자] 신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