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기선군(騎船軍)은 배를 타고 싸우는 수군(水軍)을 뜻하는데, 『경국대전』에서 수군으로 명명되기까지는 일반적으로 기선군 또는 선군(船軍)으로 불렸다. 기선군, 즉 수군은 육군인 정병(正兵)과 더불어 양인의 주요 의무 군역이었다. 1475년(성종 6)의 통계에 의하면, 총 군병 14만 8849명 중 수군이 4만 8800명, 정병이 7만 2109명이었다. 이들 수군은 연해민(沿海民)뿐만 아니라 산군인(山郡人)들로도 충원했다. 수군의 번차(番次)는 ‘2번 1삭 상체(二番一朔相遞)’로 1개월 교대로 1년에 6개월 동안 복무하며, 정병은 ‘8번 2삭 상체(八番二朔相遞)’로 1년에 3개월 복무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따라서 수군의 역은 정병에 비해 제도상으로도 배나 무거운 부담이었다. 당초 수군은 호수(戶首)와 봉족(奉足)이 서로 바꾸어 입번(立番)할 수 있었으나 규제가 강화되어 호수만 입번하게 되었고, 사람을 사서 대신 입역하게 하는 대립(代立)을 방지할 목적으로 신분증명인 칠원목패(漆圓木牌)를 차게 하였다. 그리고 수군은 입번할 때 군량을 짊어지고 변방으로 가서[赴防] 배 위에서 근무하며, 둔전(屯田)·어염(漁鹽)·해산채취(海産採取)·병선수리(兵船修理)·조운(漕運)·축성(築城) 등의 잡역에 동원되었다. 이 외에 요역(法役)과 공물·진상의 비납(備納)까지도 부담하였다. 성종 때부터 대립과 정군으로 부역하지 않고 대신 포를 바치는 방군수포(放軍收布)가 일반화되면서 수군의 역은 대립가(代立價)의 과중한 부담으로 변모되었다. 조정에서는 수군의 역이 과중하므로, 수군에게 실무는 보지 않고 그 관직에 상응하는 예우만 받는 수직(受職)을 후히 하고, 충신이나 효자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하여 주는 복호(復戶)의 혜택을 주며, 부자가 같은 곳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하는 부자완취(父子完聚)의 배려를 하였다. 그러나 역이 무거운 수군을 꺼려 양인 중 세력 없는 자만 수군에 충원되더니, 성종 때에 수군이 세전(世傳)으로 규제되어 천역(賤役)이 되었고, 조선후기에는 칠반천역(七般賤役)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용례]
敎中外大小臣僚閑良耆老軍民 王若曰 (중략) 一 騎船軍 委身危險 盡力扞禦 在所矜恤 其令所在官司蠲免賦役 加定助戶 輪番遞騎 其魚鹽之利 聽其自取 毋得公榷[『태조실록』 1년 7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