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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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장(几杖)

서지사항
항목명궤장(几杖)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기로소(耆老所), 구각장(鳩刻杖), 오피궤(烏皮几), 치사(致仕)
분야정치
유형물품 도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정년퇴직 대상인 70세 이상의 대신에게 왕이 계속 근무시킬 의도로 내려 준 의자와 지팡이.

[개설]
궤장은 검은 가죽 장식 의자인 오피궤(烏皮几)와 비둘기를 새긴 지팡이인 구각장(鳩刻杖)을 말하였다. 조선에서는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처음으로 궤장을 하사하는 제도를 두었다. 70세에 치사(致仕)하는 관료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계속 복무하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궤장을 하사하였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업무를 보려면 몸을 의지할 도구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숙종이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면서 이를 바치도록 한 이후로, 왕도 기로소 입소와 동시에 궤장을 받았다.

[연원 및 변천]
궤장은 664년(신라 문무왕 4) 김유신이 받은 것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고려와 조선에서도 이 제도를 계승하여 나이 늙은 대신에게 궤장을 하사하는 법을 제정하고 실행하였다. 『경제속육전』 「예전(禮典)」에서는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가 70세 이상이 되어도 국가의 경중(輕重)에 관계되어 관직에서 물러나지 못하고 봉조청(奉朝請)을 한 자는 궤장을 내려 준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제도는 거의 시행되지 못하다가 1420년(세종 2) 2월에 와서야 법규대로 시행할 것을 확인하였다[『세종실록』 2년 2월 26일]. 궤장을 하사할 때에는 교서도 함께 내렸는데, 세종 연간에 교서를 폐지하였다가 1467년(세조 13) 정월에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에게 궤장을 내려 줄 때에 다시 회복되었다[『세조실록』 13년 1월 22일]. 궤장은 70세가 넘은 퇴직자를 대신으로 제수할 때에도 당장 하사되어야 했다. 이러한 부담으로 70세가 넘은 경우에는 대신으로 제수하는 것을 미루기도 하였다.

70세가 넘은 대신을 관직에서 물러나지 못하게 붙잡는 것이 관례화되자 성종대에는 그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70세가 넘은 대신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그들의 건강을 염려하기 때문인데 1·2품인 그들을 물러나지 못하게 하고 7·8품의 녹(祿)을 받게 하고 있으니 노인을 공경하는 예(禮)가 아니라고 하였다. 정말 꼭 필요한 경우라면 녹을 후하게 주고 궤장도 하사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관직에서 물러나 쉬게 하자고 건의하였다[『성종실록』 8년 7월 17일].

궤장을 하사하는 제도는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그 자격은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 70세 이상으로서 국가의 대소사에 관계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할 수 없는 자였다. 이 업무는 예조(禮曹)에서 담당하였으며, 해당자를 왕에게 보고하여 허가가 나면 궤장을 내려 주었다.

그 후 임진왜란 등으로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다가, 1623년(인조 1)에 영의정 이원익에게 궤장을 하사하는 것으로 재개되었다. 이때에는 교서와 함께 술[宣醞]·음악을 내려 주었으며, 기영연(耆英宴)도 거행되었다[『인조실록』 1년 9월 7일]. 이것이 선례가 되어 1668년(현종 9) 영부사 이경석에게 궤장을 하사할 때에도 그대로 재현하였다.

이처럼 궤장은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가면서 왕에게도 궤장을 만들어 바치도록 하였다[『숙종실록』 45년 1월 28일]. 이것은 태조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영조와 고종도 이 전통을 계승하여 기로소에 들어가고 궤장을 받았다.

[형태]
궤장은 오피궤와 구각장으로서, 앉는 자리를 검은 가죽으로 싼 의자와 비둘기를 새긴 지팡이를 말하였다. 구각장의 정확한 형태는 나무를 깎아 아홉 마디를 만들고, 상단에는 비둘기를 조각하여 회색 칠을 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작은 장식을 매달았다. 지팡이 몸체는 주칠(朱漆)을 하였다.

오피궤는 양 옆에 팔걸이가 있는 의자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런데 1432년(세종 14) 4월에 의자의 형태가 맞는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주례(周禮)』의 궤도(几圖)에는 의자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지만, 그 전처럼 의자의 형태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1421년(세종 3) 1월에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에게 궤장을 내려 주었다. 그가 사은하면서 올린 전문을 보면, 오리 다리와 같이 짧고 약해졌으니 다닐 때에는 비둘기를 새긴 가벼운 지팡이를 들겠으며, 복어(鰒魚) 등과 같이 파리하고 쇠하여졌으니 앉을 때에는 검은 가죽으로 된 안온한 의자에 의지하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그 뒤 유관이 올린 전문에도 나타났다. 따라서 궤장은 70세 이상의 노인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도록 하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궤장을 하사할 때에는 일정한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사 의식에는 전·현직 의정인 시원임대신, 의정부 찬성과 참찬, 육조 판서, 한성부 판윤, 기로소와 예조 당상관들이 들어와 참가하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정조실록』8년 9월 1일]. 이와 같이 정2품 이상의 대신과 예조 당상관의 참석 하에 정해진 의식대로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왕의 친림에는 시신 및 시원임대신, 의정부 참찬, 육조 참판, 한성부 좌윤과 우윤, 육조 참의 이상이 참석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경기도향토자료관소장, 『궤장 및 사궤장연회도첩』, 1668.

■ [집필자] 임민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