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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군사 활동과 업무에 필요한 군자곡(軍資穀) 등의 물자를 담당한 호조 소속의 관청.
[개설]
고려시대 후기에는 몽골의 침입 이래 잦은 외침을 당하면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세력가들이 사사로이 차지하고 있던 대토지인 농장(農莊)은 계속 확대되었다. 그 결과 국가의 재정이 파탄하여 국방에 나선 군사들의 군량을 확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험은 공양왕 때 군자시(軍資寺)를 설치하게 된 이유가 되었고, 나아가 조선 건국 후 국정 운영에서 군량의 확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연간에서 세종 연간까지 양전(量田)에 의해 새로이 확충된 농경지와, 사사전(寺社田)의 혁파 과정에서 확보된 농경지 등을 우선 군자위전(軍資位田)으로 설정함으로써 군자곡을 비축하기 위한 재원을 꾸준히 확보하였다. 그에 따라 전국의 군창(軍倉)에 상당히 많은 군자곡을 비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서울에 비축된 군자곡을 관할한 관청이 바로 군자시에서 개편된 군자감이었다. 1895년(고종 31)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군자감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 설치된 군자시에서 비롯되었다. 군자시는 1390년(고려 공양왕 2) 고려 왕실의 물자를 관할하던 기구인 소부시(小府寺)를 혁파할 때 설치되었는데, 이때 전수도감(轉輸都監)이 폐지되면서 그곳에서 관장하던 전곡(錢穀)의 문서를 넘겨받아 관장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2년 뒤 조선의 태조로 즉위하는 이성계(李成桂)의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 조선 건국 세력의 권력은 군사 제도의 개편을 통하여 이성계가 장악한 중앙과 지방의 군사력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자시의 설치는 고려 왕실의 재원 일부를 넘겨받아 이성계의 군사력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392년(태조 1)에 군기시의 명칭을 군자감으로 고치고 군량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관직으로는 정3품 판사(判事) 2명, 종3품 감(監) 2명, 종4품 소감(少監) 2명과 승(丞) 1명, 종5품 겸승(兼丞) 1명과 주부(注簿) 3명, 종6품 겸주부(兼注簿) 1명, 종7품 직장(直長) 2명, 정8품 녹사(錄事) 2명을 두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군자위전은 거의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군기시로 이전된 재원을 계속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지의 조세 수입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군자감의 제도적 기틀을 다진 것은 태종 때였다. 태종 즉위년인 1400년부터 1405년(태종 5)까지 1차로, 1406년(태종 6)부터 1410년(태종 10)까지 2차로 적극적인 양전을 시행하여 군자위전을 대거 확보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군자곡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1409년(태종 9) 군자감이 호조(戶曹)의 속아문으로 규정될 무렵부터 군자감 창고의 증설이 논의되었고, 또 실제 증설에 착수하기도 하였다. 비록 흉년을 만나 공사가 보류되기는 하였으나, 1413년(태종 13) 용산강(龍山江)에 창고를 짓고 분감(分監)을 설치한 것이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직 및 기능]
군기감의 조직은 행정을 지휘하는 관원과 행정 실무를 수행하는 서리 등의 이속(吏屬), 창고에서 실제로 노동을 하는 노비로 구성되었다.
관원의 직제는 처음에는 판사 이하 녹사(錄事)에 이르는 체계를 갖추었으나, 1414년(태종 14) 1월에 정(正)·부정(副正)·판관(判官)의 체제로 바뀌었다. 그 뒤 1466년(세조 12)의 관제 개편 때 판관·주부(主簿)·부봉사(副奉事)·참봉(參奉) 각 1명이 더 늘어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체제로 정비되었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군자감에 속한 관원에는 정3품 정 1명, 종3품 부정 1명, 종4품 첨정(僉正) 2명, 종5품 판관 3명, 종6품 주부 3명, 종7품 직장(直長) 1명, 종8품 봉사 1명, 정9품 부봉사 1명, 종9품 참봉 1명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의정(議政) 가운데 한 사람이 겸하는 도제조(都提調)와 호조 판서가 겸임하는 제조(提調) 직책을 두어 그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한편 이속의 경우 조선시대 전기에는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조선후기에는 서원(書員) 24명, 고직(庫直) 8명, 문서직(文書直) 1명, 사령(使令) 9명, 군사(軍士) 4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군기감에 비축된 곡식이 계속 늘어남에 따라 『경국대전』이 시행될 무렵에는 도성(都城) 안 송현(松峴)에도 창고가 지어져 분감이 설치되었다. 그에 따라 조선시대 전기에는 군자감 본감(本監)과 송현 분감, 용산강 분감 등 세 곳에 관청이 있었으며, 용산강 분감은 줄여서 강감(江監)이라 불렀다. 그리고 풍저창(豊儲倉)과 광흥창(廣興倉)의 예에 따라, 본감은 판관 1명과 직장 1명, 송현 분감은 부정 1명과 직장 1명 및 녹사 1명, 강감은 정 1명, 주부 1명, 녹사 1명이 나누어 맡아 출납을 감독하게 하였다. 서리와 노비도 세 곳에 나뉘어 소속되었다.
1445년(세종 27)에 국용전 제도를 시행하면서 군자감의 재원이 되었던 군자위전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군자(軍資)의 비중은 국용과 녹봉 다음으로 설정되어 있었고, 서울의 각 관청에서 사용하고 남은 곡식이 있으면 우선 군자감에 들이도록 한 까닭에 군자감에 비축된 곡식은 여전히 늘어났다. 세조 때 본감의 창고를 다시 크게 늘려 지은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8도 중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개 도에서 군자감에 곡물을 상납하였는데, 그 가운데 토지의 생산성이 높은 충청·전라·경상 하삼도(下三道) 지역의 곡식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군자감 창고에서 관리하는 곡물은 군자로 사용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나, 곡물 비축량이 크게 늘자 묵은쌀을 봄과 여름에 민간에 대여하고 가을과 겨울에 회수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또한 비축된 곡물은 평시에는 국용과 녹봉, 진휼 등의 여러 용도로 자주 전용되었다. 특히 지방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주창(州倉)의 곡물이 부족할 때는 중앙에 올려 보낼 곡물을 사용하고 그 양을 군자감의 묵은쌀로 대체하여 충당하였다. 또 태종 때 저화(楮貨) 유통을 정착시키려 할 때도 군자감의 곡물을 적극 활용하였고, 이후에도 상평(常平)을 위해 군자감의 곡물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변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국가는 군자감의 재원을 다시 갖추고자 노력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감소된 농경지의 결수(結數)가 복구되지 못한 상황에서 1결의 수조액이 4두로 고정되어가는 한편, 수취 체제가 변화하는 가운데 삼수미(三手米), 대동미(大同米) 등 쌀로 징수하는 다른 세목이 증가함에 따라 자연히 군자감의 재정은 그 규모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7세기 말엽 이후 사회적,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군자감의 재정도 충실해져, 광흥창, 선혜청 등과 함께 국가 재정 운영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그와 아울러 군자곡의 유용과 부정부패의 사례도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관원에 대한 조정이 이루어져, 『속대전』에서는 부정·첨정·부봉사·참봉이 혁파되고, 판관·주부는 정원이 3명에서 1명으로 축소되기도 하였다.
또한 1744년(영조 20) 이후에는 두 개의 분감 가운데 송현 분감만 운영하다가 18세기 말엽 이후로는 강감만 유지하였고, 보통 30만 섬의 곡식을 저장했다고 한다. 관원의 직제는 1675년(숙종 1)에 직장 1명을 다시 두는 정도의 변화만 있었다. 군자감은 개항 후에도 유지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