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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군기시는 고려시대 후기에서 조선시대 후기에 걸쳐, 병조의 지휘 아래 군기에 해당하는 각종 물품의 제조를 담당하였다. 그 연원은 고려시대 전기에 설치된 군기감(軍器監)에서 찾을 수 있는데,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70여 년 동안은 군기감이라는 명칭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군기시로 명칭이 바뀐 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고 그 뒤 400여 년 동안 존속하였으므로, 군기시를 조선시대의 군기 제조 담당 관청으로 규정해도 큰 무리는 없다. 군기시에서는 무기 외에도 군사적으로 필요한 각종 물품의 제조를 담당하였으나, 기능의 중심은 역시 활과 화살, 화약 무기 등을 제조하는 데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화약 무기의 제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하지만 17세기를 지나는 동안 중앙의 군제(軍制)가 5군영제로 바뀌고 각 군영에서 군기의 상당 부분을 자체 제작함에 따라, 군기의 제조에서 군기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약화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군기시의 연원에 해당하는 군기감은 고려 목종(穆宗) 때 처음 설치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군기감은 고려가 원(元)나라로부터 정치적 간섭을 받아 정부 조직을 제후국 체제로 개편함에 따라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민부(民部)에 병합되었다. 이후 공민왕(恭愍王)이 반원 정책을 전개함으로서 고려가 다시 독자적으로 군사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부활되었다. 그 뒤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명칭을 군기시로 바꾸어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392년(태조 1)에 군기시의 명칭을 군기감으로 되돌렸는데, 이때 병기와 기치(旗幟), 융장(戎仗)과 집물(什物) 등을 관할한다고 그 직무를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군기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기물 전반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의 경우, 병기에 해당하는 투구와 갑옷, 각종 무기 등을 비롯하여 각급 단위 부대를 상징하고 지휘하는 데 사용되는 깃발인 기치, 왕실 의례의 의장(儀仗)과 시위(侍衛)에 갖추어야 할 물품인 융장, 그리고 그 밖에 군대의 지휘와 운영에 필요한 여러 물품인 집물 등이 모두 군기에 포함되었다. 군기감에서 다시 군기시로 명칭이 바뀐 것은 1466년(세조 12)의 일인데, 시(寺)와 감(監) 모두 정3품 아문의 호칭이므로 지위에 큰 변동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경국대전』에 ‘시’ 자를 사용하는 관청이 ‘감’ 자를 사용하는 관청보다 앞에 배치되어 있으므로 이전보다 그 비중이 높게 평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직 및 기능]
『경국대전』을 살펴보면, 군기시의 조직은 관원과 장인(匠人)의 두 부류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원 중 당상관은 모두 겸임직이었고, 당하관 관직은 10개 직책에 총 14명이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다. 군기시의 장관인 정(正)은 정3품 당하관의 직책이었다. 그런 까닭에 소속 관원의 인사고과 및 업무 감독을 위하여 다른 관청의 당상관이 겸임하는 직책인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를 두었다. 제조는 병조 판서나 병조 참판 중에서 1명, 또 무장(武將) 중에서 1명이 겸임하였다. 군기시 정 아래에는 부정(副正), 첨정(僉正), 별좌(別坐), 판관(判官), 별제(別提), 주부(主簿), 직장(直長), 봉사(奉事), 부봉사(副奉事), 참봉(參奉) 등의 관직이 있었다. 군기시의 관직 구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1품 도제조 - 겸직
종1품 제조 - 겸직
정3품 당하 정
종3품 부정
종4품 첨정
정5품 별좌
종5품 판관 2, 별좌
정6품 별제
종6품 주부 2, 별제
종7품 직장
종8품 봉사
정9품 부봉사
종9품 참봉
이 가운데 별좌와 별제, 주부 중 2명은 계속하여 군기시에서 근무하도록 하여, 업무가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1434년(세종 16)에는 북방 개척이 본격화되어 군기 제작 업무가 크게 늘자 임시직으로 권직장(權直長) 20명을 배속하였다. 또 1449년(세종 31)에는 관원 10명이 주성(鑄成)·노야(爐冶)·궁전(弓箭)·약(藥) 등의 4색(色)으로 업무를 분담하여 관할하고, 노비색(奴婢色)을 따로 두어 녹사가 관할하도록 하였다. 주성은 총통(銃筒) 등의 철물을 주조하는 것, 노야는 칼과 창 등의 무기를 단련하여 만드는 것, 궁전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것, 약은 화약을 제조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분담은 그 뒤로도 대체로 지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기시에는 총 17개 분야에 644명의 장인이 소속되어 각종 군기를 제작하였다. 그 가운데 칼이나 창을 만드는 장인인 야장(冶匠)과 연장(鍊匠)이 각각 130명과 160명으로 가장 많았다. 야장 130명 중 50명이 개성부(開城府), 10명이 양근(楊根)의 장인이었고, 연장 또한 160명 중 50명이 개성부, 10명이 양근의 장인이었다. 이로 미루어, 군기시 소속 장인의 상당수가 고려시대 후기에 군기시에 장인으로 배속되었던 사람들의 후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장인 역의 세습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으로는 궁인(弓人)이 90명, 시인(矢人)이 150명, 궁현장(弓弦匠)이 6명이었는데, 세종 때의 예를 보면 이들은 3교대로 근무하였다. 그 밖에 칠장(漆匠) 12명, 마조장(磨造匠) 12명, 유칠장(油漆匠) 2명, 주장(鑄匠) 20명, 생피장(生皮匠) 4명, 갑장(甲匠) 35명, 쟁장(錚匠) 11명, 목장(木匠) 4명, 아교장(阿膠匠) 2명, 고장(鼓匠) 4명, 연사장(鍊絲匠) 2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세종 때 북방 영토를 개척하면서 여진족과의 전투가 잦아지자 평안도와 함경도의 국경 지역 군사 요새에 화약 무기를 배치하였는데, 이때 군기시에서 화약장(火藥匠)이 유출되지 않도록 통제하였고, 화약 무기 제조를 전담하여 관할하는 관원 10명을 군기시에 소속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는, 군기시는 물론이고 어느 관서에도 화약장의 존재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노비의 수는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군기시의 장인들 가운데 주장·야장·연장 등 철물을 다루는 장인들은 자연히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였고, 따라서 군기시 소속 노비들은 주로 이들의 일을 돕는 인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에는 군인이 근무할 때 투구와 갑옷에서부터 활과 화살, 칼과 창 등의 무기를 모두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 징발된 군인들이 사용할 무기는 국가가 미리 제조하여 비축해 두고 지속적으로 점검·수리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이에 필요한 무기와 군대에서 사용하는 여러 군기를 제작하여 제공하는 것이 바로 군기시의 일이었다. 그 군기의 종류는 장인의 종류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군기시가 있던 위치는 현재 그 일부가 남아 서울시 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곳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변천]
임진왜란이 진행 중이던 1593년(선조 26)에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었고, 이후 차츰 그 규모가 확대되면서 독자적인 재정 기반을 갖추어갔다. 뒤이어 17세기에는 총융청과 수어청 등 5군영이 설치되었는데, 이들 군영 또한 각각 독자적인 재정을 바탕으로 운영됨에 따라 필요한 군기의 상당 부분을 자체 제작하였다. 그에 따라 군기시의 규모와 역할은 자연히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속대전』 단계에서 군기시 정과 부정·별좌·별제 등이 혁파되었다가, 『대전회통』단계에서 다시 강화되어 군기시 정은 복구되면서 정3품 당상관으로 승격되었고 부정이 복구되었다. 다만, 첨정이 1명으로 정원이 감축되었다. 한편 시간이 경과하면서 예하에 각기 업무를 전담하는 부서가 늘어나 『육전조례』에서는 공물이나 미·포 등을 관장하는 장무색(掌務色), 총계(銃契), 궁전(弓箭)이나 통아(筒兒) 등을 관장하는 궁전색(弓箭色), 갑주나 동개(筒箇)의 궁궐 내 반입 등을 관장하는 별조색(別造色), 화약이나 염초 등을 관장하는 주성염초색(鑄成焰硝色), 노야색(爐冶色) 등이 확인된다.
개항 이후 신식 군사 제도와 기술이 수용되기에 이르자 군기시는 1884년(고종 21)에 폐지되었고, 그 직무는 기기국(機器局)으로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