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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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신보(國王信寶)

서지사항
항목명국왕신보(國王信寶)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국새(國璽), 어보(御寶)
동의어신보(信寶)
관련어국왕행보(國王行寶), 소신지보(昭信之寶),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분야교육 출판
유형물품 도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초기 사신(事神), 사유(赦宥), 공거(貢擧) 관련 국왕 문서에 사용한 어보(御寶).

[개설]
조선초기에는 국왕 문서에 사용할 국새(國璽)의 대체 어보인 신보(信寶)와 행보(行寶)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인문(印文)은 각각 ‘국왕신보(國王信寶)’·‘국왕행보(國王行寶)’이며, 이 두 어보로부터 조선시대 국왕 문서용 어보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신보와 행보는 고려에서도 사용하였으며, 중국 새보(璽寶)의 제도에 연원을 두었다. 송(宋)나라의 14보 가운데 ‘진국신보(鎭國信寶)’·‘천자신보(天子信寶)’·‘황제신보(皇帝信寶)’가 있었고, 명(明)나라의 24보에도 ‘황제신보’·‘천자신보’ 등이 보인다.

[연원 및 변천]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3년(태조 2) 고려의 국새를 명에 반납하고, 국새를 사용해야 할 교지에는 고려 때부터 사용하던 신보를 사용하였다[『태조실록』 2년 4월 2일]. 이 인장은 1433년(세종 15) 2월까지 쓰이다가 세종의 명으로 새로 제작하였다.

조선에서 새로운 신보와 행보의 제작에 대한 논의는 1432년(세종 14) 10월 예조의 계(啓)로부터 시작되었다.

1432년(세종 14) 예조에서는 명으로부터 책봉(冊封)과 함께 받은 국새의 문구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므로 국내의 일에 쓰기가 합당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옛 제도에 따라 신보와 행보를 새로 제작하고, 국새는 사대(事大) 문서에 국한하도록 건의하였다[『세종실록』 14년 10월 12일]. 세종은 이 안건을 받아들였고, 이로부터 약 5개월 후 새로운 행보와 신보를 완성하였다. 재질은 대보와 같이 금으로 하였고, 무게는 신보 164냥, 행보 176냥이었다. 문구는 각각 ‘국왕신보’와 ‘국왕행보’로 하였다[『세종실록』 15년 3월 2일].

신보는 사신·사유·공거에, 행보는 책봉·제수(除授)로 용도를 규정하였다. 새로 제작된 신보를 처음 사용한 시기는 이 인장이 만들어진 날인 1433년(세종 15) 3월 2일로, 좌의정 이직(李稷)의 아내 허씨에게 사제(賜祭)하면서 내린 교서에 안보(安寶)하면서부터였다[『세종실록』 15년 3월 2일].

현전하는 고문서 가운데 1433년(세종 15) 제작한 국왕신보를 안보한 이른 사례는 1435년(세종 17) 4월 조서경(趙瑞卿)에게 성적과 등급, 이름을 기록하여 무과 급제를 증명하는 왕지가 있다. 1988년 보물 954호로 지정된 이 문서는 총 6행에 걸쳐 초서체로 쓰였고 연호와 연월 사이에 국왕신보를 안보하였다.

이 신보와 행보는 사용한 지 10년 만에 폐기되기에 이른다. 1443년(세종 25) 의정부에서는 예조의 첩정(牒呈)에 의하여 국왕신보와 국왕행보는 국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보문(寶文)을 ‘국왕’이라 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어보 제작을 권고하였다. 이때 국왕행보를 ‘시명지보(施命之寶)’로, 국왕신보를 ‘소신지보(昭信之寶)’로 고치는 안건을 내었다[『세종실록』 25년 10월 2일].

‘시명’의 의미는 『주역(周易)』의 “명고(命誥)를 사방에 베푼다[施命誥四方]”는 구절에서 따왔고, ‘소신’은 『국어(國語)』의 “말로써 믿음을 밝힌다[言以昭信]”는 구절을 취하였다. 세종은 이 안건을 받아들여 새로운 어보인 시명보와 소신보를 제작하였다. 이때 시험 답안지인 시권(試券)과 문·무과에 주는 합격증서인 홍패(紅牌)·백패(白牌) 등 과거 관련 문건에 사용할 과거지인(科擧之印)도 함께 제작하였다. 사용 기간은 제작 연대인 1433년부터 소신지보로 대체하기로 결정하고, 새로 완성한 1445년(세종 27)까지 약 12년이다.

[형태]
국왕신보는 무게 176냥의 금제이며, 크기는 행보와 같이 사방 10㎝이다. 서체는 구첩전(九疊篆)으로 행보와 같이 매 글자마다 9획을 정확히 지켰고, 인문은 2항 2자로 포치하였다. 구첩전은 인전(印篆)의 한 형태로 필획이 중첩되고, 분포가 균일하여 마치 벽돌을 쌓아 올린 듯한 서체를 말한다. 필획을 많이 중첩한 경우 10첩 이상인 경우도 있다. 새보와 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송대로부터 시작하여 원대에 성행했으며 모두가 주문(朱文)이다. 구첩전은 새보와 관인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서체라는 의미도 있지만,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보기도 한다. 모든 글자는 가로획의 수가 9가 되게끔 의도적으로 구성한 점 또한 공통적이다.

[참고문헌]
■ 郭福祥, 『明淸帝后寶璽』, 古宮博物院, 1994.

■ [집필자] 성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