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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군자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국유지인 공전을 개간하여 설정한 전지로, 국가의 직영지.
[내용]
국둔전은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나, 고려말엽에는 세력 있는 자들이 사사로이 점유하는 등 폐단이 심하였다. 때문에 조선건국 직후 음죽(陰竹)의 국둔전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혁파하였다.
1409년(태종 9)에 군자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시 설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국둔전 확보를 위한 개간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국둔전 경작을 위한 인원 동원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서 1428년(세종 8)에 다시 관둔전(官屯田)과 함께 혁파되었다. 비록 4군 6진이 개척되는 과정에서 평안도와 함경도 연해 지역에 국둔전을 설치·경영하였지만, 이마저도 중지시켰다.
그러다가 문종대에 이르러 평안·함경도뿐만 아니라 황해·강원도의 내륙으로 확대하여 진수군(鎭戍軍)을 동원하여 둔전을 경작하였다. 세조대에 이르면 보법(保法)과 진관 체제(鎭管體制)의 정비로 국둔전 경작을 위한 노동력 동원이 원활해지면서 국둔전은 삼남 지방으로까지 크게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용례]
戶曹據京畿節度使啓本啓 諸邑國屯田 竝令船軍治之 留浦軍少 防禦疎虞 請播種五六石以下 令其邑人吏日守奴婢治之 七八石以上 依大典令船軍治之 下詳定所議之 [『세조실록』 12년 1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