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관원을 모시고 따라다니며 수행하던 하인 또는 관청에 소속되어 잡무를 담당하던 이속.
[개설]
구종(丘從)은 두 가지 용례로 사용되었다. 첫째, 관원들이 말을 탈 때 고삐를 잡아주는 등 이들을 수행했던 하인을 구종이라 한다. 종친·공신들에게 특별히 주었던 구종은 구사(丘史)라고 하였으며, 일반 관원들도 수행하였다. 둘째, 각 관청에 소속되어 잡무를 담당하였던 관속(官屬)을 뜻한다. 이때의 구종은 본래 관노(官奴)는 아니었으나, 노비들이 구종의 일을 하여 각 관청 소속 노비로도 알려져 있다.
[담당 직무]
첫 번째 용례로서 구종의 직무는 모시는 관원을 수행하는 것이다. 관원이 출퇴근 하거나 행차를 할 때 말을 탈 수 있도록 고삐를 잡아주고, 이들을 따라다니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들 구종에게 줄 품값으로 해당 관원에게 녹봉 이외에 추가로 돈이나 물건이 제공되었는데 이를 구채(丘債)라 한다.
두 번째 용례로서 구종의 직무는 소속 관아에 쑥이나 나물, 석탄과 나무를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수령이 교체될 때 이를 영송(迎送)하는 직무도 담당하였다. 그 외에도 구종은 관아의 다양한 허드렛일을 담당하였다[『태종실록』 11년 6월 4일].
[변천]
고려시대에는 ‘구(丘)’ 대신 ‘구(驅)’ 자를 사용하여 구종이라고 하였다. 관원들의 시중을 들었던 첫 번째 용례의 구종은 재상은 2명, 3·4품 관원은 1명을 두어 함께 궁궐에 출입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1년 윤12월 2일]. 이후 5·6품 이상의 관원들은 2명을 인솔하였고, 7품 이하 9품까지의 관원은 1명을 인솔하도록 하였다가 세종대 5·6품 이상의 대간(臺諫), 7품 이하 관원에게 1명씩을 더 배정하도록 하여 그 수를 늘렸다[『세종실록』 5년 12월 8일].
1429년(세종 11)에는 각 관품별 수행 구사의 인원을 규정하였다. 대군은 10명, 정1품은 9명, 종1품은 8명, 정2품은 7명, 종2품은 6명, 정3품 중에 당상관은 5명, 당하관은 4명이었으며, 종3품에서 4품까지는 3명, 5·6품부터 9품까지는 2명이었고, 양반의 자제로 관직이 없는 자는 1명으로 규정하였다[『세종실록』 11년 2월 5일.] 그러나 관원들이 구종을 거느리면서 비용을 불법으로 만들어내는 폐단이 지적되었으며[『광해군일기(중초본)』 6년 7월 6일], 관원들이 구종의 구채가 많고 적음에만 관심을 가지며 직무에 태만하다고 지적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51년 7월 9일].
조선 개국 초 개국공신을 책봉하면서 공신들에게 구사를 주었으며, 왕자들에게 주는 구사의 수도 정해졌다. 개국공신 1등은 구사 7명, 정사공신 1등은 구사 7명, 2등은 5명을 주었다. 공신에게 준 구사 중 관노비였던 자들은 성종대 본역(本役)으로 환속시켰다. 왕자들의 구사는 10명에서 5명까지로 차등 있게 정하였다[『태종실록』 8년 12월 16일]. 그러나 종학(宗學)에 나오기를 게을리하거나 금령(禁令)을 어긴 경우에는 구사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벌로 내렸다[『세종실록』 13년 3월 5일], [『세종실록』 19년 4월 8일].
두 번째 용례인 각 관청에 소속되어서 잡무를 담당하였던 구종은 관노가 아니었음에도 관노비를 충당하여 일을 담당하게 하는 폐단이 지적되어 왔다[『태종실록』 11년 6월 4일]. 1413년(태종 13) 외방 각 관아의 노비 수를 정하면서 구종의 수도 규정하였다. 이에 따르면 유수관(留守官)은 노비 200호(戶) 내에 구종을 30호로 정하였으며, 대도호부관과 목관은 150호에 구종 25호, 현령(縣令)·감무관(監務官)은 30호 내에 구종 15호로 규정하였다[『태종실록』 13년 4월 14일]. 이들 구종은 각 관아로 출근하여 대기하다가 수령의 지시로 업무에 투입되었다.
[참고문헌]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