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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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光陵)

서지사항
항목명광릉(光陵)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능원(陵園)
동의어세조릉(世祖陵), 정희왕후릉(貞熹王后陵)
관련어능제(陵制),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병풍석(屛風石), 봉선전(奉先殿)
분야왕실
유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 세조와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의 능.

[개설]
조선 왕릉으로는 최초로 석실을 두는 대신 회격, 즉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방식으로 능을 조성하고 봉분에 석물 치장을 한 점에서, 조선시대 능제(陵制) 변화의 기점이 되는 능이다. 또한 왕과 왕비의 봉분을 같은 능역에 조성하되, 언덕을 달리하여 배치하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첫 번째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이와 같은 광릉의 능제는 17세기 이후 왕릉의 모범이 되었다. 오늘날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1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성 경위]
조선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진력한 세조는 재위 14년 만인 1468년(예종 즉위) 9월 8일에 승하하였다. 뒤를 이은 예종은 선왕의 능을 길지에 모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종친을 비롯해서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등 세조를 보필하던 중신들이 보름 넘게 여러 곳을 살핀 끝에 9월 26일 양주 땅에 터를 잡았으며[『예종실록』 즉위년 9월 26일], 왕이 직접 현지까지 가서 이를 확인하였다. 능호도 이 무렵에 와서야 ‘광릉’으로 정했다[『예종실록』 즉위년 9월 25일].

왕비 정희왕후는 세조의 등극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으로 전하는데, 세조가 승하한 뒤에도 19세에 즉위한 예종을 도와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예종이 1년 만에 세상을 뜨고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7년 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했다. 이후 1483년(성종 14)에 66세로 승하하자, 광릉 동쪽에 안장하였다. 세조의 능은 자좌오향(子坐午向) 즉 남쪽을 향하여 조성한 데 비해, 정희왕후 능은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서남쪽을 향하도록 조성하였다[『성종실록』 14년 6월 12일]. 그리고 두 능의 축선이 만나는 지점을 택하여 정자각을 세웠다[『성종실록』 14년 7월 14일].

[조성 상황]
광릉이 들어선 곳은 본래 이 지역 유력한 문중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광릉이 조성되면서 주변 약 20리의 땅이 모두 화소(火巢), 즉 능역에 속하게 되자, 많은 묘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관을 짤 나무를 비롯한 각종 물품을 지급해 주고, 역군 수십 명도 해당 문중에 보내 주었다.

세조는 승하하기 전에,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두지 말라고 유명(遺命)을 남겼다[『예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이전까지 능은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석곽을 두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중신들이 석실을 둘 것을 여러 차례 간곡히 아뢰었지만, 예종은 선왕의 뜻을 받들겠다는 뜻을 내세우며 받아들이지 않았다[『예종실록』 1년 1월 3일]. 결국 광릉은 조선왕조의 왕릉 가운데 최초로 석실을 두지 않고 목곽에 목관을 넣고 석회로 메워 다지는 회격분으로 조성되었다. 또한 봉분 주변에는 병풍석과 사대석을 배치하지 않고, 간단히 난간석만 둘렀다. 그밖에 나머지 석물들 즉 혼유석과 장명등,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망주석, 문인석과 무인석, 마석(馬石) 등은 다른 왕릉과 유사하게 설치하였다.

한편 광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능 남쪽에 봉선사(奉先寺)를 지어 조포사(造泡寺)로 삼았다. 조포사는 제사에 쓸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능을 관리하고 불교식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특히 봉선사에는 세조의 영정을 봉안한 봉선전(奉先殿)을 두어, 이곳에서 제례를 지내게 하였다.

광릉은 비록 도성에서 가까운 곳은 아니었지만 세조의 위상이 컸기 때문에, 그 이후의 왕들은 이곳까지 직접 찾아와 몸소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럴 경우, 왕은 봉선사에도 들러 봉선전에 참배하였다. 1525년(중종 20)에 중종은 이른 아침 경복궁을 출발해 도중에 두 차례 휴식을 취한 다음, 당일 저녁에 봉선사에 도착해서 먼저 봉선전에 참배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해 뜰 무렵 다시 봉선전에서 다례를 베푼 뒤 광릉에 참배하였다[『중종실록』 20년 3월 9일]. 제례를 거행한 후에는 능 위를 둘러보는 봉심(奉審)까지 하려고 했지만, 당일에 도성에 도착하기 어렵다는 대신들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변천]
광릉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노략을 당하였으나, 봉선사 승려의 노력으로 세조의 영정은 무사히 보존되었다[『선조실록』 26년 2월 20일]. 난리가 끝난 뒤 영정은 도성으로 옮겨졌는데, 이때 왕과 백관들이 5리 밖까지 나가서 맞이했다고 한다. 세조의 영정이 도성으로 옮겨진 이후에도 봉선사는 광릉의 조포사로서 그 위상을 유지하였다.

17세기 이후에도 조정에서는 광릉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지속적으로 보수를 하였다. 1686년(숙종 12)에는 정자각을 중건했다. 『광릉지(光陵志)』에 따르면, 당시 정자각은 정전 6칸에 월랑 2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장대석을 6단으로 겹쳐 놓은 높은 지대석 위에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정자각 동쪽에는 비각 2칸이 있었다. 정자각 서쪽에는 수라간인 신주 3칸, 동쪽에는 수복방 3칸이 있었고, 남쪽 160보 거리에는 홍살문이 있었다. 1보는 약 1.2m이다. 어정(御井)은 홍살문 동쪽 10보의 지점에 있었다. 왕릉과 왕후릉의 거리는 120보이며, 두 능에서 홍살문까지는 300여 보 거리였다. 이와 같은 숙종 때의 광릉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광릉은 18세기에 와서도 능제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졌다. 1789년(정조 13)에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그 명칭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치면서, 석물을 광릉의 제도에 따라 조성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3년 8월 16일]. 또한 정조는 1792년(정조 16)에 직접 광릉을 참배하기도 했다. 이때는 양주목 관아를 숙소로 삼아 첫날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일찍 능을 참배하고 당일에 환궁하였다.

한편 광릉 주변의 광대한 산림은 조선시대에도 각별하게 취급되었고, 이곳의 나무를 함부로 베는 사람은 처벌을 받았다. 그 덕분에 광릉의 수목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그 울창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도 산림 보호구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았다. 광릉은 한국전쟁 때도 화를 입지 않고 무사히 보존되었는데, 인근의 봉선사는 건물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관련 사항]
광릉은 1970년에 동구릉, 헌릉, 영릉 등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 당시의 보호 면적은 105만 9,289㎡였다. 본래 광릉의 영역은 그보다 훨씬 넓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능역의 일부를 임업 시험림으로 전용하면서 크게 축소되었다. 시험림은 광복 이후 산림청의 수목원으로 바뀌어 광릉과 별도로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최근에는 국립수목원이 되었다.

[참고문헌]
■ 『광릉지(光陵志)』

■ [집필자] 이경미